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 호방한 민족성
필자가 1983년 뗏목 ‘해모수호’를 타고 거제도에서 쓰시마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탐험할 당시의 모습.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점검하는 탐험이었다. ‘해모수’는 북부여 천제의 이름, ‘해’는 태양을 뜻한다.
필자가 1983년 뗏목 ‘해모수호’를 타고 거제도에서 쓰시마를 거쳐 일본 규슈까지 탐험할 당시의 모습.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점검하는 탐험이었다. ‘해모수’는 북부여 천제의 이름, ‘해’는 태양을 뜻한다.
이상 지향과 강한 자의식

우리에겐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격이 남달리 강했다. 우리가 살아온 동쪽의 끝(Far East)은 해가 떠오르고 문화의 씨앗이 움트는 터였다. 해는 빙하기 이후에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햇빛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집트인, 인도인, 마야인, 투르크인들처럼 인류는 해를 숭배했지만 우리처럼 집요하게 추구하고 하늘을 숭모해온 민족은 드물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의 나라 이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해(解)’씨였다. 백제의 동명(東明)도, 신라의 박혁거세도 ‘밝음’을 뜻한다. 백두산, 태백산, 부여 같은 지명들도 해와 관련이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백제의 동명제 같은 의례는 하늘을 모시는 제천행사다. 하늘의 자손(天孫), 해와 달의 자식(日月之子), 천제(天帝)임을 자처했으니 항상 자의식이 강했다. 지나칠 때는 오만과 거드름으로 변성(變性)돼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다양성과 개방성

우리 민족성은 한때는 교조적이고 쇄국적이었지만, 원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풍부했다. 문화와 혈연, 언어, 신앙, 설화 등은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다른 외모와 말을 존중했고 다른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더욱이 발전기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해양,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까지 문화공동체였으므로 당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교, 선교(풍류도),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서구 사상 등 많은 종교와 사상이 들어와 지금까지 큰 차별과 충돌 없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고구려는 다양한 문화는 물론 국제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통일신라와 발해도 다양성과 개방정신이 약화되지 않았다. 고려는 더욱 왕성하게 오키나와(유구국), 인도, 아라비아 등과 무역했고 문화를 활발하게 교류했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중국 문화와 성리학자들의 관념에 오염되면서 폐쇄성을 띠게 됐다. 시대 변화와 국제 환경에 필요한 대응력을 상실한 끝에 식민지가 돼버렸다. 하지만 백성은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서양문물을 기민하게 터득하는 영민한 사람들이라고 평가받았다.
중국 지안시(고구려 국내성) 오회분 4호묘의 해신달신 그림.
중국 지안시(고구려 국내성) 오회분 4호묘의 해신달신 그림.
조화와 통일 정신

지금 상황들을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조화와 협력’이라는 세계관을 갖고 항상 통일을 지향하는 성정이 강했다. 흔히 우리는 당파성이 강하다고 자타가 말한다. 한 개인은 매우 똑똑한데 두세 사람이 모이면 갈등과 분열이 생긴다고 자조한다. 일본이 당쟁 등을 침소봉대해 생래적인 민족성인 것처럼 세뇌시켰고, 그 결과 지금은 내부 분열이 도를 넘었다.

우리 역사의 초창기에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섞여 정치의 혼란, 사회의 혼란이 격화될 우려가 컸다. 그런데 우리는 동질성을 모색하고 문화 갈등과 격차를 해소하려 노력했다. 결국은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상을 정립시켰다. 단군신화가 표방하는 ‘단계적인 변증법’ ‘3의 논리’ ‘홍익인간’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원(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인들은 정복한 여러 종족을 포용하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해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통일신라는 비록 외국의 힘을 빌려 정치적인 통일을 이룩했지만 화엄사상과 원효의 화쟁(和諍)사상 등이 빛을 발했다.

나도 어릴 때만 해도 온 동네를 내 집처럼 여기고 남의 일에 참견을 잘했다. 누구나 김치나 된장 같은 발효음식과 곰탕, 비빔밥처럼 섞는 음식을 좋아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한 민족’으로 남았고, 분열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타고난 성격 때문이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을 썼지만 한 시대의 문화나 민족성은 영원불변한 것도 아니고 일시에 만들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붕괴를 향해 질주하고 인간성은 재빠르게 오염되는 지금, 과학적으로 자기를 성찰하고 세계인들, 세계 문화들과 객관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그리고 변성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멋들어진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 동아시아의 평화, 인류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라도.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우리 역사의 초창기에는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섞여 정치의 혼란, 사회의 혼란이 격화될 우려가 컸다. 그런데 우리는 동질성을 모색하고 문화 갈등과 격차를 해소하려 노력했다. 결국은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사상을 정립시켰다. 단군신화가 표방하는 ‘단계적인 변증법’ ‘3의 논리’ ‘홍익인간’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