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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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고구려·신라·백제에 가야·부여 더한 5국시대로 봐야, 900년 가까이 존속한 부여…많은 국가들이 계승해
우리는 고대를 ‘삼국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야를 포함하면 ‘사국 시대’고, 거기에 부여까지 더하면 ‘오국 시대’가 된다. ‘부여’는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와 성격을 지니는 나라다. 원조선을 빼놓고는 가장 먼저 국가로 등장했고, 무려 900년 가까이 존속했다. 부여를 계승한 나라들우선 부여를 표방하거나 계승한 나라들을 살펴보자. 첫째, ‘북부여’다. 414년 세워진 광개토태왕비의 첫머리에는 추모(주몽)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물신인 하백의 따님이라고 새겼다. 또 직전에 만들어진 모두루총의 묘지석에는 추모성왕이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썼으며, 그 밖에 여러 기록이 해모수를 북부여 천제라고 했다.둘째, ‘제1 동부여’다. 부여의 왕 해부루는 동쪽으로 이전하고 국명을 동부여라고 변경했다. 아들 금와왕은 해모수의 부인인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왔고,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성장하면서 대소 등 왕자들과 갈등을 일으켜 탈출했다. (동)부여는 285년 선비족에 수도가 점령되면서 왕은 자살하고, 백성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어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병합됐다가 494년 문자왕에게 항복했다.셋째, ‘홀본부여’다. 《삼국사기》에는 ‘졸본(卒本)’으로 표기했지만, 광개토태왕 비문에 새겨졌듯이 ‘홀본(忽本)’이 정확하다. ‘홀’은 ‘골’ ‘마을’ ‘나라’를 뜻하는 부여계 말이다. 그러므로 홀본은 ‘홀’의 근본, 즉 원(原)부여일 가능성이 크다. 주몽은 소서노 등 연씨 세력이 장악한 홀본부여를 토대로 고구려를 건국했으므로, 《위서》 등에는 &l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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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풍부한 지하자원에다 어업·목축업도 발달…중국에 대규모 말 수출, 일본과 활발한 해양무역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조선·부여·고구려 기술 물려받아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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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토와 부여의 풍속 계승한 '황제국' 발해…중국·일본 옛 기록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 서술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첫 국호는 ‘고려’로 추정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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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로 발전하며 문화정책 힘 쏟은 백제의 유산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이 연속 3회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유라시아대륙을 몇 번 횡단했는데, 매번 한류(韓流)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란의 이스파한시에서는 싸이의 말춤을 시민들과 함께 췄고,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횡단할 때는 “주몽”을 외치며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청년들과 신나게 웃어 젖히기도 했다. 2019년 한국의 문화콘텐츠 수출은 103억달러였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2019년 11월 말까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박스오피스 매출이 1억1000만달러에 이른다. 정보, 통신, 건축 등을 포함한 문화산업의 규모와 이익은 이보다 훨씬 더 크다. 기쁘고도 놀랄 만한 현상이다.우리 역사에서는 이 같은 문화산업 및 문화수출 현상이 없었을까? 백제가 멸망할 때 인구는 고구려보다 많은 76만 호(戶), 약 380만 명이었다(《구당서》 《삼국사기》). 농경, 어업은 물론 상업, 무역이 활발하면 국부가 창출되고 경제력이 강해진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시대에 예성강 이북까지 북상했고, 마한 지역을 장악한 뒤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이어 신라와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더해 ‘요서 진출설’과 ‘양자강 유역 점유설’이 주장될 정도였으니 군수산업은 분명 활성화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환경과 국민정서, 오랜 문화전통으로 인해 문화가 발달했고, 문화정책에 힘을 더 기울인 듯하다. 차원이 다른 예술품 금동대향로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이를 확신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됐다.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높이 62.5㎝, 무게 11.8㎏의 ‘금동대향로’다. 이 향로는 뚜껑, 몸체, 받침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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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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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초창기 만주부터 일본까지 문화공동체 형성…개방·포용·다양성 발전시켜 세계로 나아가야
이상 지향과 강한 자의식우리에겐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격이 남달리 강했다. 우리가 살아온 동쪽의 끝(Far East)은 해가 떠오르고 문화의 씨앗이 움트는 터였다. 해는 빙하기 이후에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햇빛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집트인, 인도인, 마야인, 투르크인들처럼 인류는 해를 숭배했지만 우리처럼 집요하게 추구하고 하늘을 숭모해온 민족은 드물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의 나라 이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해(解)’씨였다. 백제의 동명(東明)도, 신라의 박혁거세도 ‘밝음’을 뜻한다. 백두산, 태백산, 부여 같은 지명들도 해와 관련이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백제의 동명제 같은 의례는 하늘을 모시는 제천행사다. 하늘의 자손(天孫), 해와 달의 자식(日月之子), 천제(天帝)임을 자처했으니 항상 자의식이 강했다. 지나칠 때는 오만과 거드름으로 변성(變性)돼서 안타깝지만 말이다.다양성과 개방성우리 민족성은 한때는 교조적이고 쇄국적이었지만, 원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풍부했다. 문화와 혈연, 언어, 신앙, 설화 등은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다른 외모와 말을 존중했고 다른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더욱이 발전기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해양,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까지 문화공동체였으므로 당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교, 선교(풍류도),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서구 사상 등 많은 종교와 사상이 들어와 지금까지 큰 차별과 충돌 없이 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