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4) 발해의 산업·무역
중국 산둥성 등주항(현 봉례시) 내항 모습. 발해 수군이 점령했던 성으로 발해인과 신라인이 무역하던 곳이다.  윤명철 제공
중국 산둥성 등주항(현 봉례시) 내항 모습. 발해 수군이 점령했던 성으로 발해인과 신라인이 무역하던 곳이다. 윤명철 제공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조선·부여·고구려 기술 물려받아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

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해는 원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처럼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다. 러시아가 17세기 중반부터 극동 지역으로 진출한 중요한 이유는 질 좋은 모피를 획득할 수 있었고, 모피 세금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베링해를 발견한 것은 해달피를 얻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였다.

또 강(江)어업도 중요한 사업이었다. 사료에는 미타호(흥개호)의 붕어만 특산물로 기록돼 있지만, 흘러든 유기물로 인해 물색이 검게 된 송화강 하류 그리고 흑룡강(아무르강)에는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근대까지도 어업은 동만주의 주력 산업이었고, 소수 민족은 생선을 식량·비료로 사용했으며, 껍질로는 의복·신발·장식품을 생산하는 어피문화를 발전시켰다. 산둥 제나라로 말(馬) 수출부여는 명마(名馬)의 산지였고, 원조선과 고구려는 말 수출 국가로 유명했다. 발해 또한 지역적인 특성상 목축업이 발달했다. 특히 솔빈부(우수리스크)의 말은 뛰어나서,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일가가 세운 산둥반도의 제(齊)나라로 수출했다. 말 떼를 육로로 압록강 하류까지 몰고 간 후 단둥시 외곽인 박작구(고구려의 박작성)에서 운반선에 실어 서해 북부 해양과 발해 해협을 통과해 등주(지금의 봉래시)에서 하역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하구에 세운 정안국도 말을 대규모로 보유했고, 송나라에 매년 1만 필 이상을 수출했다(《송서》). 어느 때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발해의 배(船)는 동중국해 절강 지역(저우산군도·舟山群島)까지 나아갔다(《여지기승》).

본격적인 무역 국가로 성장한 발해는 당나라에 무역을 겸한 사신단을 132차례나 파견했고, 투르크(돌궐)와도 교역했다. 특히 고구려 후기부터 교류해온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지역)과 함께 실크로드 무역망에 참여했으며, 경교(동방기독교) 같은 서쪽 문화도 수용했다. 그런데 국가 정책, 과학기술과 산업, 발해인들의 기질과 능력이 발휘된 분야는 일본과의 해양 무역이었다.

8세기의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기 위한 정치·군사 교류에 비중을 뒀다. 특히 일본은 항해 능력이 달려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를 얻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구난희 《발해와 일본의 교류》). 하지만 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냉전 시대가 끝나고, 무역의 시대로 바뀌며 발해·일 관계도 ‘쌍방교류’에서 경제교류가 주목적인 발해의 ‘일방교류’로 전환됐다. 일본에 34차례 공식 사절단 파견발해는 일본에 공식 사절단을 34차례나 파견했다. 사신선에는 관리와 상인 외에 지방세력인 수령도 정책적인 배려로 동승할 수 있었다. 그런데 746년에는 발해인과 철리부(하바로프스크 추정) 사람이 무려 1100여 명이나 출우(아키타현)에 도착했다가 송환됐다. 이런 사례를 보면 발해의 민간 상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지방세력과 사(私)무역을 벌였고, 철과 주석을 교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 상륙한 사신단 일부는 항구에 세운 객관(客館)과 객원(客院)에서 몇 달씩 장사를 했으며, 나머지는 수도로 들어가서 외교 활동을 벌이고 본격적인 무역을 했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 및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모피 가공을 주요 산업으로 발전시켜 왕실과 수령의 부를 확장시키는 수출품으로 활용했고 말도 수출했다. 국가 정책, 과학기술과 산업, 발해인들의 기질과 능력이 발휘된 분야는 일본과의 해양 무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