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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발해, 풍부한 지하자원에다 어업·목축업도 발달…중국에 대규모 말 수출, 일본과 활발한 해양무역

    우리는 발해의 역사 그리고 거친 자연환경을 극복한 발해인의 생각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한다. 발해가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에 멸망했다는 ‘가십’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게 올바른 역사 인식일까. 고구려 유민이 주력인 소수의 독립군이 부활시킨 나라, 문명국인 고구려 변방에 터를 잡고 거친 자연 및 덜 세련된 주변 종족과 더불어 새 질서, 새 문화를 재창조한 나라, 그 발해를 중국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부르게 한 실질적인 원동력은 무엇일까? 고조선·부여·고구려 기술 물려받아발해 산업의 실상은 생태환경과 후발 국가들, 계승 민족들의 삶과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노성(백두산 근처)의 쌀이 유명하고, 책성(훈춘)의 된장은 수출품이었으며, 만주 일대와 연해주라는 지경학적 환경을 활용해 특수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위성(함경북도 무산)의 철도 유명했는데 ‘철주’라고 부른 요동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고의 철 생산지였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물려받은 기술력으로 풍부한 철을 가공해 농기구와 무기 등을 대량 생산했다. 또 풍부한 금과 은(삼강평원 일대)으로 일본제 수은을 활용한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당나라에서 진귀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이런 기괴한 것(공예품)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찬받았다(방학봉 《발해경제사연구》).흑룡강 중류 이하, 송화강 하류, 목단강 하류, 우수리강 유역은 대규모 침엽수림지대라서 약초를 비롯해 꿀·산삼·인삼·녹용 등의 수출품이 풍부하게 나왔고, 호랑이·표범·곰·사슴·늑대·토끼·여우·족제비·담비가 서식했다. 발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몽골·티베트 등 아시아 각지로 흩어진 고구려 유민…불모지 개척, 접경세력과 전투에 이용당했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요동지역 고구려인 2만명 이하로 줄어645년, 고당(高唐)전쟁에서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요동성(遼東城) 전투에서 패배해 군인과 백성 등 7만여 명이 요주(요서·요동) 등으로 끌려갔고, 다시 1만4000명이 유주(幽州·베이징 일대)로 끌려가 정착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당하면서 보장왕과 연남산 등의 귀족들과 함께 고사계 같은 장군들, 관리들, 기술자들, 예술가들 그리고 군인과 백성 등 3만 명이 묶인 채로 중국의 시안(長安)까지 끌려갔다.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성주 양만춘의 지도력과 고구려인의 자유의지, 고립무원 상태의 안시성 '승리의 기적' 이끌어냈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고·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는 대당(對唐)정책을 놓고 요하전선 중심의 적극적인 대결을 주장하는 연개소문 세력과 해양 방어, 수성전을 선호하는 영류왕 세력으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였다. 당나라의 총체적인 전력을 분산시키는 외교군사전략을 입체적으로 추진해야 했지만 다 실패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남부에서 백제, 신라를 외교·군사적으로 압력을 가하면서 당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이었다.이렇게 광범위한 전선이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고·당 전쟁은 고·수 전쟁을 계승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장악하고, 북방의 유목민족을 포위하는 대응전선을 구축하는 ‘제2차 동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90일간의 안시성 공방안시성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90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당나라군은 사정거리 1000m의 기계식 활인 교차노(絞車弩), 이동식 투석기인 포차, 근거리 중형무기인 박간 등으로 성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수 대체한 당, 주변국 복속하며 중화중심 체제 노려…내분 휩싸인 고구려, 당과 백제·신라 연결 차단 주력

    말을 타고 고구려 영토를 질주하면서 고구려인이 돼가던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안시성을 찾았다. 산 위로 올라가 점장대 자리에서 성안의 골짜기와 멀리 산들을 바라보던 중 두 단어가 떠올랐다. ‘기적’ 그리고 ‘자유의지(free will)’였다. 둘레 4㎞에 불과한 이 산성에서 당 태종이 지휘하는 최강의 10여만 대군을 패퇴시켰다니….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 패배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싸움인데도 항복을 거부한 그들, 90일간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고구려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지닌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변국 무릎 꿇리는 당나라고·수(高·隋) 전쟁에서 대패한 수나라는 곧 자체 분열됐다. 수를 대체한 당나라는 종주권 회복, 중화중심의 체제 완결이라는 중국적인 숙명도 계승했다. 대운하를 이용해 남북을 하나의 상권과 경제권으로 발전시켰다. 수도인 장안에는 페르시아인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망을 확장했고, 남쪽에서는 인도, 아라비아까지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됐다. 당 태종은 외교술로 북방 초원의 강국인 돌궐제국을 동서로 분열시켰고, 약화된 동돌궐을 복속시켰다(630년).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 지방)을 공격했고(639년),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서쪽에서는 비잔틴제국까지 이어진 무역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 지역)을 멸망시켰다(640년).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시)은 627년부터 조공사절을 보냈고, 바르후만왕은 ‘강거도독’이 됐다. 석국(타슈켄트) 안국(부하라) 등 소국들도 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