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7) 대륙과 해양을 넘나든 한민족
신석기 시대에 새겨진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일종의 제사의례 유적이다. 다양한 종류의 선박과 포획 장면에서 당시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문화권이 연해주·오호츠크해·동해 남부로 이뤄졌으며, 동해연안항로 이용이 활발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 새겨진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일종의 제사의례 유적이다. 다양한 종류의 선박과 포획 장면에서 당시 고래잡이가 성행했고 문화권이 연해주·오호츠크해·동해 남부로 이뤄졌으며, 동해연안항로 이용이 활발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

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

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

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
랴오둥반도·일본열도에서 발굴한 석기시대 유물 한반도에서도 발견…벼농사도 해양활동으로 전파
해로로 전래된 벼농사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은 고조선 문화의 지표다. 랴오둥반도 남부 해안지대에 많지만 최근에는 압록강 이북의 내륙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에서는 대동강 하류에 거대한 고인돌이 대규모로 밀집돼 북한은 주체사관 이후에 ‘대동강 문화론’을 주장할 정도다. 그리고 서해안을 따라 경기만, 충청도, 전라도 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무려 4만 기가 있다. 산둥반도와 저장성에도 일부 있다. 그래서 고인돌을 ‘환황해문화권’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하문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 견해).

또 하나, 해양이 우리의 삶과 직결됐다는 증거는 벼농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대략 4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했다. 우리가 먹은 단립미는 중국의 화북에서 랴오둥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설, 산둥반도에서 황해를 건넜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벼농사 지역으로 부각되는 저장지역에서 장립미가 바다를 건너 경기만으로 상륙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벼농사의 길’은 육로가 아니라 해로였다는 점이다. 나는 1997년에 저장성의 허무뚜 유적지와 가까운 주산군도에서 ‘동아지중해호’라는 뗏목을 출발시켜 17일 만에 흑산도에 도착했다. 선사시대에도 두 지역 사이에 교류가 가능했고, 항로는 후대에 사료에 기록된 것과 같았음을 입증했다. 일본열도에서는 벼농사가 기원전 3세기(야요이 시대) 무렵에 북부 규슈에서 시작됐다. 한반도 남부에서 이주민들이 볍씨와 토기, 무기 등을 갖고 대거 바다를 건넜던 때다.

해양활동의 실상 명확히 깨달아야

이처럼 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개를 캐고 해안가의 물고기를 잡는 삶의 터전으로 바다를 친숙하게 대했다. 때로는 먼 거리를 항해하면서 발달된 토기와 도구를 교환하고, 벼농사 문화를 수용하며, 고인돌·토기 등 문화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했다.

수출입 물동량의 99% 이상을 해로로 운송하는 나라, 1994년부터 200해리의 구간을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인정하는 세계, 11개 해역에서 영토 갈등이 발생하는 동아시아의 현실. 이 속에서 현재와 미래의 발전전략을 찾고, 역사를 규명하고 자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해양활동의 실상들을 알아야 한다. 늦었다 싶을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조개를 캐고 해안가의 물고기를 잡는 삶의 터전으로 바다를 친숙하게 대했다. 때로는 먼 거리를 항해하면서 발달된 토기와 도구를 교환하고, 벼농사 문화를 수용하며, 고인돌·토기 등 문화를 전달하는 통로로 활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