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1) 대탐험 나선 한민족
야요이시대 사람의 생물학적 유사성일본 야요이문화를 발전시킨 이주민들의 정체는 생물학적인 성격을 분석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유골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며, 코가 높다. 하니하라 가즈로 일본 도쿄대 교수는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인구 모델을 적용했더니 기원전 300년 경부터 기원후 700년까지 원주민의 비율과 도래인(진출자)의 비율은 1 대 9.6이었다. 또 두개골의 형태를 비교했더니 원주민과 이주계의 혼혈 비율이 서부 일본은 1 대 9 내지 2 대 8에 가깝고, 간토(關東) 지방은 3 대 7이었다. 1000년 동안 사람들이 대규모로 험한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것이다. 또 신라계 주민들이 주로 개척한 돗토리현의 야요이인들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조사한 결과는 놀랍게도 혼슈지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했다.
이런 역사를 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론’ ‘일선동조론’ ‘동조동근론’,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천황의 신민인 우리는 창씨개명해야 한다며 동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그들은 주(主)와 부(副)를 속였다. 우리가 주이고, 일본인의 원형이었다.
조한(朝漢)전쟁과 한민족의 이주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재미가 있고, 의미도 크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있다. 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을까? 그 동기를 알고, 신천지를 개척한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
우선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 세계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국 대륙은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계속했다. 북방의 흉노가 침공하면서 숱한 유민이 생겨 동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원조선(고조선)에서는 이주민인 위만이 왕위를 찬탈하자 준왕이 주민들과 함께 한륙도의 남쪽으로 피신했다. 이어 동아지중해의 무역권과 질서를 둘러싸고 ‘조·한전쟁’이 벌어졌고, 멸망한 원조선의 유민들도 남쪽으로 밀려들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자연스럽게 신기술과 발전된 문화들이 전파되면서 제철산업과 군수산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 벼농사가 활성화되면서 경제력 또한 급상승했다. 사료와 각종 유물이 증명하듯 상업과 무역이 활발해졌으며, 김해 사천 창녕 등 남부해안 일대는 중계무역 거점으로 부상했다. <삼국지> 변진전과 <통전> 마한전에는 왜가 진한에서 철을 사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열도 향해 오랫동안 이어진 배의 행렬
이렇게 해서 일본열도에 대한 정보들이 축적되고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일본열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상인들은 부를 거머쥐기 위해, 농민들은 새 땅을 얻거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그리고 젊은이들은 장보고처럼 야심을 갖고 떠났다. 동아지중해의 남쪽 바다에는 금속으로 만든 날카로운 창과 칼을 든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들과 샛노란 볍씨들이 가득 담긴, 소박하지만 단단한 김해식 토기를 든 여인들이 탄 배의 행렬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한민족의 대항해시대, 대탐험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바다를 여러 차례 항해하고 현장들을 조사하면서 2000여 년 전 쪽배나 뗏목을 타고 일본열도에 상륙한 선조들의 용기와 개척정신에 감동받아 부르르 떨곤 했다.
국제정세 분석가로 유명한 조지 프리드먼은 <넥스트 데케이드(Next Decade)>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역사적인 이유로 한국은 일본을 멸시하며 중국을 불신한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뇌로 왜곡된 역사, 그늘진 자의식, 근거 없는 굴레들은 진짜로 부숴버려야 한다. 봉인됐던 진짜 유전인자를 발아시켜 가며, 더욱 더 침착하고 의연하게 중국과 일본에 대응할 시대가 됐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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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에 대한 정보들이 축적되고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일본열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동아지중해의 남쪽 바다에는 금속으로 만든 날카로운 창과 칼을 든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들과 샛노란 볍씨들이 가득 담긴, 소박하지만 단단한 김해식 토기를 든 여인들이 탄 배의 행렬이 오랫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