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전쟁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새 농토·풍성한 수확물 찾아 대항해 나선 한반도 남부인…1000년 동안 철기와 볍씨 쪽배에 실어 남해 건넜다
야요이시대 사람의 생물학적 유사성일본 야요이문화를 발전시킨 이주민들의 정체는 생물학적인 성격을 분석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유골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며, 코가 높다. 하니하라 가즈로 일본 도쿄대 교수는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인구 모델을 적용했더니 기원전 300년 경부터 기원후 700년까지 원주민의 비율과 도래인(진출자)의 비율은 1 대 9.6이었다. 또 두개골의 형태를 비교했더니 원주민과 이주계의 혼혈 비율이 서부 일본은 1 대 9 내지 2 대 8에 가깝고, 간토(關東) 지방은 3 대 7이었다. 1000년 동안 사람들이 대규모로 험한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것이다. 또 신라계 주민들이 주로 개척한 돗토리현의 야요이인들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조사한 결과는 놀랍게도 혼슈지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했다.이런 역사를 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론’ ‘일선동조론’ ‘동조동근론’,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천황의 신민인 우리는 창씨개명해야 한다며 동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그들은 주(主)와 부(副)를 속였다. 우리가 주이고, 일본인의 원형이었다.조한(朝漢)전쟁과 한민족의 이주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재미가 있고, 의미도 크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있다. 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을까? 그 동기를 알고, 신천지를 개척한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우선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 세계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국 대륙은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계속했다. 북방의 흉노가 침공하면서 숱한 유민이 생겨 동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원조선(고조선)에서는 이주민인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반도·일본 소국 차단하며 환황해무역 독점한 원조선…BC 2세기 漢나라와 동아시아 해상권 놓고 무력충돌
춘추전국시대는 물론이고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진(秦)나라도 광저우시에 적재량 30t짜리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세웠으며, 동남아시아 지역과 물소 뿔, 상아, 비취, 진주 등의 상품을 무역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들어와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 무역망 구축 나선 한나라한나라는 건국 이후 60여 년 동안 유목민족인 흉노국에 굴욕을 당했는데, 한무제가 등장해 40여 년 동안 공격한 끝에 분할 지배(devide and rule)하는 데 성공했다. 또 남쪽으로는 기원전 112년에 양복에게 수군 10만 명을 줘 광둥(廣東), 광시(廣西), 베트남 북부지역인 남월(南越)을 멸망시킨 후 동남아시아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망을 구축했다. 서쪽으로는 장건을 파견해 흉노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정보와 경험 등을 얻었다. 동쪽으로도 관심을 기울였다. 서력 기원을 전후해 한반도의 삼한 소국들 및 왜 소국들과 교류한 기록이 많고, 여러 지역 심지어는 제주도 등에서도 연나라, 한나라의 화폐가 발견된다.사실은 진시황도 해양과 동방에 관심이 많아 네 차례나 해안가 요충지들을 순시했는데, 무려 세 번에 걸쳐 산둥해안과 발해를 방문했다. 그가 파견한 서복(徐福)과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은 황해를 건너 남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머문 후 일본 열도에 상륙했다. 불로초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치장했지만 실제로는 동쪽지역의 지리, 산물, 정치 상황 등의 정보 수집과 무역을 추진한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시진핑 정부가 중국을 가운데 놓고 동서남북으로 대륙과 해양에서 경(經)·정(政)·군(軍)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