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10) 일본열도로 간 개척자들
우리는 정말 1000회 가깝게 침략만 받았는가? 우리는 한 번도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거나 개척한 적이 없었는가? 이렇게 자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기이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고대에 망망대해를 건너 일본열도에 상륙한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본인들의 주장처럼 ‘귀화인’일까, 또는 ‘도래인’일까. 아니면 ‘개척자’나 ‘정복자’였을까.일본 고서에 비치는 외부 정복자들
<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왜’ ‘왜인’ ‘왜병’ 등으로 표현된 집단에 쉴 새 없이 침략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일본열도를 공격하거나 진출한 기록은 없다. 실성왕 때(407년) 대마도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빼놓고는 그랬다. <삼국유사>가 그나마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를 실었다.
이와 달리 일본의 <고사기>(신화를 담은 역사책의 일종, 712년)와 <일본서기>(역사책, 720년)에는 초기부터 외부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한 상황이 표현돼 있다. 일본의 국기인 히노마루로 상징된 태양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폭풍(또는 대지)의 신인 스사노오 노미코토, 천손(天孫)인 니니기노 미코토처럼 ‘천(天)신’ ‘해(海)신’ ‘지(地)신’들은 일본열도의 바깥에서 온 집단들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면 지금껏 풀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로 남은 일본 민족과 일본 문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와는 어떤 관계로 출발했을까.
일본열도에는 군마현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구석기 시대인들이 살았다. 신석기 시대에는 조오몽인들이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크고 문양이 복잡한 토기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기원전 4~3세기 무렵부터 낯선 사람들이 배를 타고 물밀듯 몰려오더니 이들을 쫓아냈다. 이렇게 해서 600년에 걸쳐 질적으로 다른 ‘야요이(彌生)시대’가 시작됐다. 그렇다면 바다 건너에서 상륙한 그 항해자들, 정복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다양한 일본인 기원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양자강 하구설’ ‘오키나와 및 동남아시아설’ ‘남태평양설’ ‘극동 시베리아설’ 그리고 대륙이라고 수상쩍게 포장한 ‘한반도설’ 등을 내세운다. 물론 모두 다 근거는 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이 쳐놓은 덫에 빠지지 않고 사실을 확인하려면 빈도, 규모, 영향력 등을 놓고 경중을 따져봐야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총, 균, 쇠>에서 일본어는 신라어로 이어지는 현대 한국어와 다르다고 했다. 일본인이 현대 한국과 관련이 적다는 뉘앙스를 담은 주장이다. 최근 이렇게 인식하는 지식인이 늘고 있다. 동아시아의 상황과 한민족의 역사, 그리고 일본의 고대역사와 지리 등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본은 고대(7세기 중엽)를 기점으로 성격이 크게 변할 뿐 아니라, 영토도 규슈와 혼슈의 중부까지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도쿄 일대 등도 7세기 말에 들어와 개척됐고, 혼슈도 서쪽 해안과 삼림지대에서는 8세기 내내 하이(아이누로 추정)와 전투가 벌어졌을 정도였다. 오키나와(유구국)는 1879년에, 홋카이도는 메이지 시대에 전투를 벌여 빼앗은 곳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개척자들은 최종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여러 항구에서 출항한 사람들이다.
한륙도 남부와 유사한 일본 유물들
우선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원양항해를 할 수 있는 항해술이 부족했고 대규모 인원과 물자를 운반하는 배를 건조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가장 가깝고, 대마도와 이끼섬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할 수 있는 한륙도(韓陸島·한반도를 새롭게 인식한 용어) 남부가 양질의 출발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의 창세신화, 건국신화, 심지어는 지방설화의 주인공들까지 죄다 한륙도 남부와 연관이 깊다.
또 이 시대에 시작된 최고의 첨단산업인 벼농사는 기술자 집단이 이주해 장기간 시험 재배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규슈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탄화한 볍씨들은 김해 패총의 단립미와 같은 종류다. 출토된 돌낫, 반달형 돌칼, 절구, 호미, 괭이 같은 농기구도 우리 것과 너무 닮았다. 농사용어들도 비슷한 것이 많다. 무덤도 우리 것과 유사한 고인돌, 상자식 석관묘, 옹관묘 등이 많고 한국식 (세형)동검 등도 발견된다.
이렇게 이주민이 늘어나고 생산력이 확장되고 무기 성능까지 향상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규슈 일대에만 100여 개의 소국이 생겼다(<후한서 동이전> 참고). 이어 빠른 속도로 동진해 넓은 지역에 걸쳐 야요이 문화를 발전시켰다. 마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을 장악한 뒤 서부개척에 나선 것처럼 말이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 기억해주세요
기원전 4~3세기 무렵부터 낯선 사람들이 배를 타고 일본열도로 물밀듯 몰려오더니 조오몽인들을 쫓아냈다. 이렇게 해서 600년에 걸쳐 질적으로 다른 ‘야요이(彌生)시대’가 시작됐다. 그 개척자들은 최종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여러 항구에서 출항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