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1) 대륙과 해양문화의 접점, 탐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1) 대륙과 해양문화의 접점, 탐라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독특할 뿐 아니라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琉球國)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1991년 남쪽의 미야코섬(宮古島)을 조사할 때 제주도 용담동 것과 동일한 고인돌을 발견했다. 그 후 이 섬에 홍길동이 도착해 조선촌을 건설했다는 흥미로운 주장들이 나왔다(설성경 설). 고려 때인 1019년에는 탐라사람 21명이 폭풍을 맞아 털 난 사람들이 옷 벗고 사는 동남쪽섬(오키나와)에 표착했고, 1096년 표류했던 탐라사람들은 20명이 죽고 3명만 탈출했다. 조선시대 영조 땐 장한철이 오키나와 남쪽의 호산도까지 표류했고, 순조 땐 홍어 장수인 문순득이 흑산도 해역에서 오키나와까지 표착한 다음에 여송(루손), 마카오, 명나라를 경유해 조선에 귀환했다. 변방에서 진주로 빛날 가능성반면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는 귤 같은 남방 식물이 재배됐다고 기록됐고, 《탐라지》 등에 소개된 차귀당신 같은 뱀 숭배는 남방계 신앙이다. 유구국은 고려시대부터 사신단들을 파견했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들어왔다. 세종 때(1429년)에는 포모가라 등 15명의 유구인들이 울진현에 표착했다. 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유구국 왕을 구하러 가던 왕세자가 폭풍우로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제주목사가 이들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은 일마저 있었다. 이렇게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공식·비공식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구국은 조선에 35차례의 사신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2회의 사신을 파견하는 데 그쳤다.
탐라는 해양 소국이었지만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교차로였으며, 물류망의 거점(hub)이었다. 또한 대륙문화와 해양 남방문화가 만나고, 범동아시아의 대부분 종족이 모여 발전한 문화의 심장(heart)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눌렸던 변방의 섬이었고, 피해 의식과 쌓인 한도 적지 않았다. 이제 해양의 시대를 다시 맞이한 제주도가 탐라국의 개방성과 능동성을 회복한다면 동아시아 세계의 진주로 빛날 수 있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