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7) 양안(兩岸)국가 가야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7) 양안(兩岸)국가 가야

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해를 왕복하면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등이 바다를 사이에 둔 ‘양안(兩岸) 국가’ 또는 식민 모국(母國)과 자국(子國)의 2중 체제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스페인의 ‘지브롤터’는 영국 영토이고, 반대로 아프리카의 ‘세우타’는 스페인 영토라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렇다면 가야는 원격통치를 하는 양안 국가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 열도에 오랫동안 진출하면서 교류했고, 대한해협은 교통과 통신이 가능할 정도로 짧은 거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열도 북부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건국신화 등은 이런 상황을 뒷받침한다.

이 신화는 기본 줄거리가 단군신화와 김수로왕 신화처럼 천손강림 신화다. 내용은 물론이고 붉은 천에 쌓여 내려온 지명도 거의 비슷하다(구시후루는 구지봉과 음이 비슷함). 이 때문에 가야계 집단이 일본 열도에 도착해 고대국가를 형성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정치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국제질서를 고려하면 주체는 원가야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편찬한 주체는 당시 상황을 모호하게 서술함으로써 종속적이었던 왜 집단을 주체인 것처럼 해석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국가설’을 낳게 만들었다(천관우). 가야계 지명은 지금도 쓰시마(대마도)나 규슈 북부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천손을 모시는 기리시마 신궁 근처에는 ‘가라구니다케(韓國岳)’가 있다. 고대부터 항해자들이 처음 도착하는 규슈 북부에는 ‘가라의 항구’라는 뜻인 ‘가라쓰’가 있는데, 원래는 ‘한진(韓津)’으로 사용했으나 14세기부터 ‘당진(唐津)’으로 바꿔 버렸다. 500년 역사의 기록도 못남긴 가야6세기 중반에 가까워지면서 대형 배의 건조술과 원거리 항해술이 발달하고, 신라와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일본 열도에 적극 진출했다. 위상이 약해진 가야연맹은 망국에 가까운 국난을 겪고도 통일에 실패한 채 지탱하다 신라에 각개 격파되고, 남은 대가야도 562년에 멸망했다. 그 결과 한때 남해의 양안을 통치한 해양왕국 가야는 500년 역사를 기록조차 제대로 못 남겼고, 일부만 일본 역사 속에 남겨 두었을 뿐이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