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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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가야의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 서쪽지역 지배…대한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한 것으로 봐야
5세기 들어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가야, 양안 국가 체제 선택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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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철제무기로 3~4세기 일본 진출한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과 4국 해양 경쟁시대 열어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5세기에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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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연결하며 활발했던 가야연맹의 해양 무역…고구려 남진에 대응해 일본 열도로 조직적 진출
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에는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등 청동기 및 철기문화와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이 무렵 만들어진 창원의 다호리 고분에서는 청동검과 중국제 거울, 각종 철제품, 오수전과 토기들, 붓, 화살 등이 출토됐다. 근처 사천의 늑도 유적지에서는 철기류와 토기들이 나왔으며 일본 야요이 중기의 토기도 출토됐다. 1세기 유적인 김해 양동리 일대에서도 철기 유적이 나타났다. 실제로 《삼국지》 변진(弁辰 또는 卞辰)조에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니 한(韓) 예(濊) 왜(倭)가 와서 취하며, 매매할 때는 철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양무역 활발한 상업국가또 연나라 명도전(원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 나온다)과 그 후의 오수전, 화천 같은 화폐가 서해 북부 해안지대를 거쳐 한반도 남부 해안을 지나 제주도, 일본 열도까지 발견된다. 일종의 화폐 유통권이 성립된 상황을 반영한다. 삼한 소국의 일부는 바다를 건너 중국 지역은 물론 일본 열도와 무역을 하고 식민지도 건설했다. 일본 열도에는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 100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3세기 전반 무렵에는 30여 나라가 있었으며, 야마대국이 제일 컸다. 당연히 이 소국들의 주체는 한륙도에서 건너간 개척민이었다.이처럼 초보적인 무역권의 범위가 동아지중해 전체로 확산되면서 일본 열도가 그 시스템에 편입되는 역사의 전환기에 남해동부 해안에는 ‘무역도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삼한의 해양 소국들은 강력한 선단을 보유하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뱃길, 좋은 항구와 선원을 확보하는 해양력 경쟁을 벌여야 했다. 물목을 장악한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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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 이남 소국 연합체 '삼한'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남동해안에 무역선·사신선 머문 여러 국제항 만들어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권력을 분산한 지방분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청동기 이후 인류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전기에는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뤘다.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진출했고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는 데 실패해 일찍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四國)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해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유타국 허황옥 설화가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는 ‘가야’ ‘가라’ ‘게야’ 등의 지명이 있으며 보통 ‘韓’으로 표기된다. 후에는 1870년대에 일본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한 ‘정한론’처럼 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 건국과 발전의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데서 이 같은 다양성이 나온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건국설화가 두 개 실려 있다. 하나는 9간(干, 칸)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하나는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 실체를 알기 힘든 허황옥(許黃玉) 이야기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닿았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16세의 여인과 오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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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류 차지·해양발전 전략 추진한 신라, 한반도 동남쪽 변방국가에서 끝내 승자로
단양 하류인 충주는 전근대까지도 한반도 내부에 있는 최고 교통요지였다. 낙동강 수로망이 시작되는 문경에서 육로로 조령(문경새재)을 넘어오면 충주에서 남한강의 수로망과 만난다. 따라서 충주는 낙동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 최고의 수로망, 거기에 육로망이 교차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고, 내륙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한반도 최고 수로망 충주 점령이 때문에 고구려도 이곳을 점령한 직후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그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을 정도였다. 이후 신라는 남해안과 낙동강 수로망, 남한강과 서울지역을 낀 한강 본류의 수로망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질서의 이해>). 조금 훗날이지만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은 신라로 투항했고, 충주의 탄금대로 이주해 살았다. 뛰어난 음악으로 가야의 마음을 통일시키려 했던 그는 운명을 따라 신라에서 자기 뜻을 펼쳤다.신라 사회는 자신감에 가득 찼고, 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특별한 연호를 사용했다.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와 맺은 혼인동맹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공동 점령지였던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신주’를 설치했는데, 초대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고, 훗날 신라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당연히 점령지를 빼앗긴 백제와 멸망 위기에 몰린 대가야는 동맹을 맺고 554년에 신라를 협공했다. 하지만 백제의 중흥군주였던 성왕이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동해안에 북진 발판신라는 승리했지만 백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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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울릉도·동해안 점령하며 해양활동 강화
한민족의 근대 이후 100여 년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다. 35년의 긴 식민지 생활을 자초했고, 다시 동족상잔이라는 자기파멸을 시도하면서 죽음과 폐허, 가난을 남겼다. 그런데 또 50여 년 만에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500년 이상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약 60년 만에 강국이 됐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나 최후의 승자가 됐다. 신라는 도약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이 6세기 내내 지속됐고, 해양발전이라는 국가전략의 선택과 김이사부 같은 뛰어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512년에 영토 확장 신호탄서기 500년, 지증 마립간이 등장했다. 그는 곧 ‘으뜸 되는 간(칸)’이라는 고유 명칭을 버리고, 중국식인 ‘왕’으로 고쳤고,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신라’ 등에서 ‘신라’라고 고정시켰다. 신라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즉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그물처럼 사방으로 펼쳐진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512년에 본격적인 영토 확장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그해, ‘김이사부’라는 20대 초의 젊은 왕족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은 동해 중부의 항구를 출항해 망망대해를 항해한 끝에 160여㎞ 떨어진 우산국(울릉도)에 당도했다. 그리고 배 이물(앞머리)에 나무를 깎아 세운 사자로 위협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이 해양소국을 점령했다. 그는 새로 설치한 실직주(삼척)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해양작전을 준비했고, 고구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자주(自主) 획득과 실지 회복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본 열도로 진출하는 울진, 삼척, 강릉 등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동해 중부 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