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6) 기마문화와 무역 발달한 가야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6) 기마문화와 무역 발달한 가야
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 5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중국에선 위진 남북조시대로 접어들었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은 중국의 분단을 이용해 해양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따라서 해양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됐으며, 고대 국가의 규모와 활동 범위도 확장됐다. 고구려는 팽창의 기회를 맞아 북방 진출을 추진하는 한편 400년에는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구원 요청을 명분 삼아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남진시켰다. 백제·가야·왜 세력은 고구려에 대패했고, 이때 금관가야의 일부는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 등으로 흡수됐지만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갔을 것이다. 고구려도 404년 대방계 전투 이후에는 왜군을 쫓아 남해와 동해남부를 건넜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 또한 고구려의 압력에 대응하고, 무역을 목표로 일본 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활발하고 역동적인 4국의 일본 열도 진출 시대가 도래했다. 일본 속 가야의 흔적일본 열도에서 새로 축조되는 전방후원분들은 더욱 커지고, 내부도 횡혈식으로 바뀌면서 철제무기와 마구들, 금은 세공품들이 매장됐다. 2600여 기가 남은 전방후원분 분포를 보면 대략 4~5개 지역에 집중됐다. 또한 5세기 후반에 ‘기히(吉備)의 난’, 6세기 전반 규슈에서 ‘이와이(磐井)의 난’이 각각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통일되기 이전에 4~5개의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으며, 중심은 관서 지역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왜 세력들은 백제와 무역 및 인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했고, 사료에서 보이듯 정치·군사적으로도 관련이 깊었다. 또 ‘왜국’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일부는 전남의 전방후원분들에서 나타나듯 한반도 남부에도 진출했다. √ 기억해주세요 우수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5세기에 들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일본 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활발하고 역동적인 4국의 일본열도 진출 시대가 도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