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3) 약소국 신라의 도약
울릉도 남서동의 고분군. 기단식 적석석실분. 6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울릉도 남서동의 고분군. 기단식 적석석실분. 6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
단양 하류인 충주는 전근대까지도 한반도 내부에 있는 최고 교통요지였다. 낙동강 수로망이 시작되는 문경에서 육로로 조령(문경새재)을 넘어오면 충주에서 남한강의 수로망과 만난다. 따라서 충주는 낙동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 최고의 수로망, 거기에 육로망이 교차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고, 내륙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한반도 최고 수로망 충주 점령
한강하류 차지·해양발전 전략 추진한 신라, 한반도 동남쪽 변방국가에서 끝내 승자로
이 때문에 고구려도 이곳을 점령한 직후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그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을 정도였다. 이후 신라는 남해안과 낙동강 수로망, 남한강과 서울지역을 낀 한강 본류의 수로망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질서의 이해>). 조금 훗날이지만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은 신라로 투항했고, 충주의 탄금대로 이주해 살았다. 뛰어난 음악으로 가야의 마음을 통일시키려 했던 그는 운명을 따라 신라에서 자기 뜻을 펼쳤다.

신라 사회는 자신감에 가득 찼고, 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특별한 연호를 사용했다.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와 맺은 혼인동맹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공동 점령지였던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신주’를 설치했는데, 초대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고, 훗날 신라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당연히 점령지를 빼앗긴 백제와 멸망 위기에 몰린 대가야는 동맹을 맺고 554년에 신라를 협공했다. 하지만 백제의 중흥군주였던 성왕이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동해안에 북진 발판신라는 승리했지만 백제와는 영원한 원수가 됐고, 가야·고구려와는 적대관계가 되면서 사방이 포위된 위기상황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정복활동은 멈출 줄 몰랐다. 555년에는 경남 창녕과 함안 등에 관청을 설치해 서부 낙동강 하류의 수로망, 동부 남해의 물류망과 해양능력을 완벽하게 획득했다. 다음 해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을 추진해 비열홀(안변)을 설치했고, 북진의 발판을 만들었다. 이어 557년에는 서울과 광주 지역에 북한산주를 설치해 더욱 공고하게 지배했다. 이제 신라는 남양만 등 경기만을 이용해 중국 지역과 해양교류를 펼치면서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진입했고, 훗날 삼국통일의 강력한 군사력이 된 서해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숨을 고른 후인 562년에 김이사부는 어린 화랑인 사다함의 분전에 힘입어 가야의 500여 년 역사를 완전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후에는 이사부가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어느덧 70대 중반에 이른 그는 병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쩌면 이어지는 전투에서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신라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566년에는 통일의지를 담은 황룡사를 완공했고, 북진을 계속해서 황초령비, 마운령비에서 보이듯 함경남도 해안지방을 점령했다. 서해 수군 육성·중국과 해양교류불가사의하다. 만성적인 약소국이 빠른 시간에 부국강병을 이루려면 군사력과 경제력이 급속하게 팽창해야 하며, 내부의 통일은 필수적이고, 끝없이 요구되는 인재를 공급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많은 나라가 이런 위업에 도전했지만, 대부분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라는 줄기찬 정복 작전과 피아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외교활동, 정통성 확립과 자의식 고양을 위한 <국사>의 편찬, 통일을 선언하고, 의지를 집약시킬 황룡사 건축,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모을 음악의 발달과 화랑도의 개시라는 엄청난 일들을 단기간에 실현했다. 거기에는 김이사부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동해 중부와 남해 동부, 서해 중부의 핵심 항구를 장악하고, 낙동강과 한강의 내륙 수로망을 확보했다. 국제적으로는 해양력을 이용해 분단된 중국의 남북조를 상대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하고, 일본열도의 왜국과도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갖춘 해륙국가의 토대는 100여 년 뒤에 삼국의 통일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강대국으로 도약하다 멈춘 채로 분열되는 지금의 한국에 신라의 정책과 김이사부라는 인물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신라는 줄기찬 정복 작전과 피아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외교활동, 정통성 확립과 자의식 고양을 위한 국사 편찬, 통일을 선언하고 의지를 집약시킬 황룡사 건축,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모을 음악의 발달과 화랑도의 개시라는 엄청난 일들을 단기간에 실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