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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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상업에 무관심한 군사집단이 장기간 중동지역 지배…교역 주도권이 유럽에 넘어가며 '대항해 시대' 불러
전반적으로 전근대 시기 이슬람권의 산업기술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지만 교역 측면에선 여건이 좋았다. 산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인력과 축력이 주로 이용됐다. 풍력과 수력을 이용한 풍차와 수차는 사용되긴 했지만 유럽보단 널리 퍼지지 못했다. 자동화기기는 간혹 만들어지긴 했지만 장난감 정도에 응용됐다. 에너지 관련 기술에서 중동이 뒤처진 것은 서유럽과 같은 목재, 석탄, 목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계 탓이 컸다. 유럽에 비해 강의 수도 적었고 낙차가 크지 않아 수력을 활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석유가 물론 많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에너지원으로 적극 파낼 기술도 없었고, 석유를 채굴해도 바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서양 장거리 교역에 최적이었던 중동지역목재와 금속 산출이 적다 보니 바퀴가 달린 탈것의 숫자도 적었다. 이는 도로망 같은 교통시스템 개선을 더디게 했다. 14세기에 모로코 출신이었던 이븐 바투타가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가는 도중 투르크인들이 바퀴 달린 수레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선 “신기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여행가 볼니는 “시리아 전체에서 마차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했다. 교통은 대부분 낙타 같은 동물을 통해 이뤄지거나 수운을 통해 이뤄졌다. 기원전 2000년께부터 운송에 활용된 낙타는 하루에 1200파운드의 짐을 싣고 200마일을 갈 수 있었다. 17일간 물을 마시지 않고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전근대 시기 기술로는 낙타보다 더 유용한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했고, 그 이유로 대체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나타나지 않았다.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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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하류 차지·해양발전 전략 추진한 신라, 한반도 동남쪽 변방국가에서 끝내 승자로
단양 하류인 충주는 전근대까지도 한반도 내부에 있는 최고 교통요지였다. 낙동강 수로망이 시작되는 문경에서 육로로 조령(문경새재)을 넘어오면 충주에서 남한강의 수로망과 만난다. 따라서 충주는 낙동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 최고의 수로망, 거기에 육로망이 교차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고, 내륙 최고의 항구도시였다. 한반도 최고 수로망 충주 점령이 때문에 고구려도 이곳을 점령한 직후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그 유명한 ‘충주 고구려비’를 세웠을 정도였다. 이후 신라는 남해안과 낙동강 수로망, 남한강과 서울지역을 낀 한강 본류의 수로망을 유기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윤명철, <해양활동과 국제질서의 이해>). 조금 훗날이지만 가야금을 만든 우륵(于勒)은 신라로 투항했고, 충주의 탄금대로 이주해 살았다. 뛰어난 음악으로 가야의 마음을 통일시키려 했던 그는 운명을 따라 신라에서 자기 뜻을 펼쳤다.신라 사회는 자신감에 가득 찼고, 진흥왕은 친정을 시작했으며 ‘개국(開國)’이라는 특별한 연호를 사용했다.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와 맺은 혼인동맹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공동 점령지였던 서울을 포함한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그리고 신속하게 ‘신주’를 설치했는데, 초대 군주로 임명된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고, 훗날 신라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당연히 점령지를 빼앗긴 백제와 멸망 위기에 몰린 대가야는 동맹을 맺고 554년에 신라를 협공했다. 하지만 백제의 중흥군주였던 성왕이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동해안에 북진 발판신라는 승리했지만 백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