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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삼국통일 전쟁의 후유증…일본과 적대관계, 잦은 해적 약탈에도 신라·日 무역 꾸준히 증가

    신라는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8년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당나라의 편을 들었다. 661년부터 신라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당나라와 갈등을 빚다가 8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676년에 불완전하지만 자체의 통일을 이룩했다. 하지만 7세기 후반에 신라는 내부적으로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고, 재편된 신국제질서 속에서 자기 위상을 적립해야하는 과제가 있었다. 고구려가 부활한 북국인 발해와는 군사적인 긴장상태에 있었고, 새로 탄생한 일본국과는 충돌을 그치지 않았다.동아시아 세계는 8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전후 질서가 안정되고, 외교와 무역 문화를 주고받는 열전시대로 진입하고 있었다. 신라는 서해와 동중국, 남해를 이용할 수 있는 물류망의 허브였다. 당나라의 상품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일본의 토산품과 공산품들을 당나라에 수출하는 중계무역을 해야 했다. 일본에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망을 확장해야만 했다. 신라는 668년부터 779년까지 일본에 사신단을 47회나 파견했다. 일본의 신라정토론통일을 외세에 의존한 신라는 일본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감정적으로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초기부터 갈등관계가 있었지만, 결국 8세기 중반 무렵에는 국교가 단절됐다.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도 고조됐다.일본은 소위 ‘신라정토론’으로 알려진 정책을 추진했다. 내부적으로는 신라를 적으로 삼아 국가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실세인 친백제계 후지와라(등원) 일가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 뿐 아니라 실제로 신라를 공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759년 9월에는 전국에 명을 내려 배 500척을 3년 안에 건조하도록 할당을 했다. 760년 4월에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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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문화·종족 불완전한 신라의 삼국통일…원조선·고구려 계승 아쉬운 '반쪽 통합' 그쳐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떠 당나라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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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실한 준비로 백제와 고구려 무릎 꿇린 신라, 2단계로 당나라와 전쟁 이겨 삼국통일 이뤘다

    국가적 위기는 대부분 대혼란과 체제 붕괴로 이어진다. 고비를 넘겨 극복하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평가가 엇갈리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렇다.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약소국이었는데 약 150년 후인 668년 삼국을 통일했다. 거기까지는 1단계로 볼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는 수준이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진정한 실현은 2단계인, 8년에 걸친 나당(羅唐)전쟁에서 승리하고 내부 안정을 완성했을 때다. 왕권 강화와 선진 문물 수용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우산국 복속(512년)을 시작으로 전략지구를 체계적으로 장악해 외교망을 확장하고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또 기존 체제와 신앙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 끝에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진흥왕 33년에 사찰을 세우고, 전사한 사졸(士卒)들을 위로하는 ‘팔관연회’를 열어 사상의 통일을 유도했다. 통일사업의 주체인 자장, 의상 등은 유학 승려였고, 전통신앙과 불교가 조화된 화랑도는 종교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김춘추의 활발한 외교활동신라의 통일정책 중 의미있는 것은 국제질서에 진입하고,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떴다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했다. 642년 의자왕에게 40여 개 성을 빼앗기고, 이어 대야성을 공격당해 성주인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으나,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달라는 제의를 거부해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다. 고립무원 신세인 신라는 643년 당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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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멸망이후 10년 끈 나·당 전쟁 이겼지만 대륙 잃은 한민족, 동아지중해 조정역할 약화

    660년 당과 신라 연합군은 수륙양면군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지만 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남부에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국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북부와 만주에서는 당군이 거느린 다국적군과 말갈을 동원한 고구려군 간 공방전이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계속됐다. 663년 8월 나당 연합군과 백·왜 동맹군 사이에서 백강해전이 벌어졌다. 탐라의 수군도 참가한 치열한 전투였지만, 백·왜 동맹군은 참패를 당했다. 백제 유민과 왜군은 일본열도로 탈출했다.왜국은 나당 수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664년 해안가의 임시정청을 20여㎞ 내륙인 다자이후(太宰府)로 옮겼다. 이어 가네다성, 오노성, 기이성을 필두로 대마도, 규슈, 세토 내해를 거쳐 나라 지역까지 전략적 요충지마다 해양방어체제를 갖췄다. 모두 도호?쇼(答春初) 등 망명한 백제 달솔(백제의 16관등 중 제2위 품관)들이 주도한 백제식 산성이다. 그리고 당과 화친 교섭을 시도했다. 700년 역사와 자유의지를 남긴 채 사라진 고구려고구려는 백·왜 동맹군과 협동작전을 시도했으며, 666년을 비롯해 전쟁 중에도 여러 번 왜국에 사신을 보냈다. 왜군은 고구려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외교활동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시 외곽의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됐다. 강국(사마르칸트) 왕에게 온 외교사절 가운데 두 명이 머리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고구려인이었다. 국제관계로 봤을 때 튀르크인이나 소그드인 상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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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왜 동맹군과 고구려, 신라와 연합한 당과 전쟁. 동아시아 질서 재편전쟁…70년 소용돌이 휘말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에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가정(What if)’이 없다면 역사는 박제물일 뿐,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라가 주도한 이른바 삼국통일은 불완전했지만 의미가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전개된 역사를 살펴볼 때 고구려가 민족통일을 했다면 더 긍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백강과 탄현 방어 못한 백제의 멸망고구려에 대패한 당태종은 648년에 죽고, ‘고구려 멸망’이라는 숙명적인 중국의 과제는 고종이 이어받아 659년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660년 음력 7월 초,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와 1900여 척의 함선(삼국유사)이 산동반도의 성산항을 출항했다. 서해를 횡단한 수군은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서 대기하던 신라 함대 100척과 합류한 뒤 백제의 경기만과 당진·홍성·군산 등 해안에 상륙했다. 주력군은 금강하구 전투를 끝내고 수륙양면군으로 수도 사비성 공략을 시도했다. 이 무렵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한 계백 장군은 나당 상륙군과 협공하려는 김유신의 5만 군대를 저지하다가 황산벌에서 산화했다. 백강과 탄현 방어를 간언한 성충과 흥수라는 전문가를 배척한 의자왕은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해보고 항복했다.백제에선 바로 저항군이 결성돼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왜국에 도움을 청했다. 왜국은 정세 판단의 미숙과 해전 능력 부족 때문에 파병이 더뎠다. 일본 천황(이하 역사서 명칭에 따름)이 661년 2월 규슈 북부에 도착해 임시관청을 설치하다 죽고, 뒤이어 아들 덴치(훗날 천황)가 8월에 군사와 무기, 식량 등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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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화랑, 충성·용기·우애 갖춘 인재 양성제도…자유의지와 사명감으로 삼국통일 위업 달성 앞장

    신라의 화랑은 어떤 존재들이었을까? 화랑은 ‘풍월도’를 수행하는 젊은이 집단이다. ‘화랑도’는 일본 학자 미지나 아키히데가 만든 조어다. 《삼국사기》는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미 풍월주가 있었다. 신채호나 최남선 등의 견해를 고려하면 원조선을 계승하면서 건국 초부터 비슷한 조직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5세기부터 고구려 문화와 ‘조의선인(고구려의 수행자 군사집단)’ 등의 영향을 받으며 구체화되고, 질적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강국의 기초 ‘화랑’최치원이 쓴 《난랑비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 …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많은 생명과 만나 변화를 이룬다.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 그들은 ‘하늘(天)에 대한 맹세’를 하고,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혼란하면 가히 맹세를 행한다’는 내용을 돌에 새겼다(임신서기석). 또 승려인 원광은 7세기 초, 위기 상황에서 화랑의 역할을 사군이충(事君以忠)·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임전무퇴(臨戰無退)·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정의했다. ‘충과 효’라는 국가의 가치관과 ‘우애와 용기’라는 사회적 가치관, 그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상을 구현하는 ‘청년결사체’를 지향한 것이다.차세대 리더들인 화랑은 왕 또는 고승이 추천한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었다. 각각 수백 명에서 1000명 정도의 낭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독특한 수행 방법을 지녔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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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부흥운동서 패한 유민들 대마도에 방어기지 구축

    한반도에서 대마도에 가장 먼저 진출한 세력은 김해에 기반을 둔 구야한국 등 가야연맹들이다. 17세기에 편찬된 《대주신사지(對州神社志)》에는 옛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 시다루의 해변에 큰 항아리가 흘러 왔는데,… ‘나는 가라로부터 왔으니 가라국이 보이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했다. 항아리를 뒷산에 안치했더니, 만조 때는 물이 찼고, 간조 때는 물이 빠졌다….” 이는 가야인들의 항해 과정과 연관이 깊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만의 안쪽인 이 마을에서는 가야계인 스에키 토기의 파편이 많이 발견됐다. 신라 건국 초기부터 대마도 왜인의 침공 잦아대마도는 신라와도 관련이 깊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한 초기부터 침입한 왜인들의 기사가 자주 나타난다. 주로 남풍이 부는 4~5월경에 침입한 이들 가운데 대마도의 왜인들이 많았다.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대마도를 출항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대마도에는 신공황후와 연관된 전설과 물건들을 숭배하는 신사(神社)들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8년 왜병들이 대마도에 군대와 무기, 식량 등 군수물자를 쌓아놓고 침공하려 하자 신라는 대마도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웠다.나는 1982년 겨울 밤, 사고마을의 덴신다쿠쓰다마 신사에서 벌어지는 ‘오이리마세’라는 의례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천도(天道)신앙’이라는 고대 신앙을 남긴 이곳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에서 ‘죄인이 신당에 들어가면 감히 잡지 못한다(罪人 走入神堂 卽亦不敢追捕)’라고 기록했다. 마한에 있던 소도신앙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명철 《일본기행》, 1989년) 애증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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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