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3) 신라의 화랑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43) 신라의 화랑


차세대 리더들인 화랑은 왕 또는 고승이 추천한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었다. 각각 수백 명에서 1000명 정도의 낭도를 거느렸다. 그들은 독특한 수행 방법을 지녔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화랑 무리가 도의를 함께 닦고, 노래와 춤을 더불어 즐기며, 명산과 큰 강을 찾아 멀리 가보지 않은 곳이 없으며…’라고 나와 있다. 신라의 청소년들은 고구려 쌍영총·무용총 벽화나 온달이 참여한 낙랑언덕의 행사처럼 거친 자연을 찾았다. 육체적인 훈련과 명상, 춤 등의 수행을 하면서 외경심과 실존을 체험했다. 또 지리와 전술을 익히고 전투훈련을 하며 기상과 용기, 동료애를 다졌다. 그리고 백성들과 접촉하고 만나면서 이상정치를 위한 마음과 지혜를 찾았다. 화랑 사다함·관창·원효왕손이자 화랑인 김사다함은 1000여 낭도를 거느렸다. 562년에 김이사부가 가야국을 공격할 때 15세의 나이로 출정해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생사고락을 맹세한 동료가 병으로 사망하자, 7일 동안 비통해 하다 결국 죽고 말았다. 김관창은 어려서 화랑이 됐고, 15세 때 무열왕 김춘추에게 천거됐다. 660년, 관창은 백제군과 황산벌에서 전투를 벌일 때 홀로 돌진해 싸우다 포로가 됐다. 계백장군은 어린 관창을 풀어 줬지만, 수치심을 못 이긴 그는 또다시 돌격해 포로가 됐다. 계백은 결국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신라군은 피 흘리는 관창의 목을 보고는 진격했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원효도 어린 시절에는 낭도였다가 승려가 됐으니, 국가에 충성하는 화랑 출신 승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新)화랑’ 출현을 고대하며약소국인 신라는 5세기부터 고구려 영향과 초원 유목문화를 수용해 발전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어 가야와 백제를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삼국통일을 실현했다. 그 위업에는 산업 발전과 기술력, 군사력과 경제력도 작용했지만 용기와 자유의지, 사명감으로 가득한 ‘화랑’이라는 인재와 ‘풍월도’라는 고유 사상의 역할이 컸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풍류를 ‘멋스럽게 노는 일’로,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들은 ‘바람기 있고 멋 부리는 행위’로 변질시켰다.
지금 한국은 국가와 사회의 지표가 분명치 않다. 경제는 나빠지고, 사회 갈등은 더욱 심각해지고,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청년들은 창의력과 용기를 잃고, 단기적인 삶에 몰두하고, 아이들은 가치와 사유를 교육받을 기회조차 빼앗긴 채 정치 권력, 금력과 결탁한 대중연예문화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풍류를 ‘멋스럽게 노는 일’ ‘바람기 있고 멋 부리는 행위’로 변질시킨 성리학자들과 일제에 굴복한 지식인들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이 시대에 안중근, 신채호, 윤봉길 같은 ‘신(新)화랑’의 출현을 고대한다. 광야에서 초인을 외쳐 부른 이육사의 심정으로.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