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59) 신라의 삼국통일 의미
죽은 뒤에 동해의 호국룡이 되겠다고 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죽은 뒤에 동해의 호국룡이 되겠다고 한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다.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떠 당나라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

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 멸망시켰다. 고구려 유민들도 요동과 요서에서 복국전쟁을 펼치고 있었다. 당나라 내부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676년 설인귀의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패하자 완전히 철수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화해·공격·굴복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민족통일 사업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사찰 등 건설하며 정신 통일·공동체 복원신라는 당나라의 문화, 의복, 제도, 연호, 책봉 등 많은 것을 선택해서 정체성과 자의식이 약해졌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탓에 국토가 황폐해졌고, 질병과 군량미 공급으로 농민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또 외국 군대의 공격과 장기간의 진주 등은 동족 간, 지역 간에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을 낳았다. 정부는 유민들에게 관직을 주고, 군대에도 편입시켰으며(신형식, 《통일신라사연구》), 부석사·감은사 등 사찰을 많이 건립해 공존의식과 공동체를 복원하려고 했다. 원효(화쟁사상)를 비롯한 승려들도 전쟁의 상처와 회한, 민족분열 등을 치유하는 일에 동참했다.

신라는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과는 전쟁도 불사했다. 선박 300척을 동원한 일본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해양방어체제를 증강했다. 732년 발해의 공격을 받은 당나라의 요구에 군사를 파견했고, 이후 발해와는 냉전체제를 지속했다. 8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신라는 안정을 찾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비로소 삼국통일의 성과를 누렸다. 8세기 중반에야 삼국통일의 성과 누려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종족적 통합을 부분적으로 성공시켰을 뿐인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재분단된 남북국 시대가 되면서 원조선과 고구려 문화는 불완전하게 전승됐고, 자원·영토도 상실했다. 만주지역의 여러 종족은 훗날 요·금·원·청 등으로 변신해 한민족을 압박했다. 남쪽에서는 일본국이 탄생해 경쟁과 적대적인 관계로 변질됐다(윤명철, 《역사활동과 사관의 이해》).

남북한의 적대관계와 남한의 동서 분열, 한국이 속국이었다고 세계에 선언하는 중국의 무한팽창, 한민족의 영구분열을 획책하는 일본, 해양 진출의 교두보를 원하는 러시아, 대륙 세력을 막는 초병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미국…. 이런 혼란의 시대에 신라인들의 애국심, 세계를 보는 눈, 인재 양성책 등은 남북통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방법론을 찾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신라는 당나라와 화해·공격·굴복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립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문화, 의복, 제도, 연호, 책봉 등 많은 것을 선택해서 정체성과 자의식이 약해졌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종족적 통합을 부분적으로 성공시켰을 뿐인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재분단된 남북국 시대가 되면서 원조선과 고구려 문화는 불완전하게 전승됐고, 자원·영토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