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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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경제·문화·종족 불완전한 신라의 삼국통일…원조선·고구려 계승 아쉬운 '반쪽 통합' 그쳐
신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대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경제 기반을 탄탄히 다지고 군사력과 해양활동을 강화했다. 불교를 공인하고 이를 왕권 강화, 새로운 인재 육성, 선진 문물 수용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국제환경의 가치와 이용 가능성에 눈을 떠 당나라와 각각 백제(평양 이남)와 고구려 영토를 갖기로 합의했다.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삼국통일전쟁은 2단계로 접어들었다. 나당 연합군의 주도권은 항상 당나라가 가졌다. 신라는 영토의 보존과 자주를 택하는 강경정책을 썼고, 670년 8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됐다.신라는 유민들을 활용해서 민족전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군과 백제군(당나라가 파견한 부여융이 지휘하는 군대)을 격파하고, 사비성까지 탈환해 백제 영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671년 10월에는 당나라의 군수선 70여 척을 격파했고, 고구려 복국군과 연합해 672년에 백빙(수)산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했다. 673년에는 함선 100척을 서해에 배치해 초계활동을 벌였다. 675년에는 칠중성(적성면)에서 패했으나, 매초성(양주)전투에서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파했다. 唐 내부 혼란·고구려 유민 활용신라의 강경책이 성공한 비결은 동아시아의 국제환경이 자국에 유리한 것을 파악하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고종이 병에 걸려 부인인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국이 어지러웠다. 제1 투르크 제국 멸망 후에도 투르크족의 반란은 계속됐고, 거란은 요서지방에서 위협적으로 성장 중이었다. 충돌을 반복하던 토번은 670년 18주를 빼앗았고, 677년에도 당나라를 패배시켰으며, 당나라의 종속국으로 만든 청해성과 감숙성 남부의 토욕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