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8) 동해의 해양소국, 우산국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8) 동해의 해양소국, 우산국


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울진에서 159㎞, 강릉에서 178㎞, 삼척에서 161㎞, 포항에서 217㎞다. 《삼국유사》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2일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가 있는데, 주변이 2만6730보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사시대 유적도 발굴돼하지만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동해를 건넜다. 섬 안에서 기원전 300년께의 무문토기들이 출토됐고, 1998년에는 고인돌, 선돌 등 제사 유적지들이 발견됐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울릉도와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들도 있다. 《삼국지》·동이전 동옥저에는 동예(동해북부 해안) 사람들이 바다표범 가죽을 고구려에 바쳤으며, 먼 바다까지 항해했다고 나와 있다. 또 245년 고구려 동천왕을 추격하던 왕기(위나라 관리)가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십일간 표류하다 큰 바다 가운데 섬에 닿았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바다 가운데 한 나라가 있는데 오로지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여인국은 어디일까? 쿠릴섬(사할린섬), 니가타 앞 사도(佐島)섬, 그리고 울릉도(이병도 설, 이케우치 히로 설)라는 설들이 있다. 물론 확정된 것은 없지만, 그 무렵 동해 원양까지 어업을 한 사실들은 인정한 것이다. 군사력 보유했지만 신라에 복속울릉도가 역사상 중요한 위치로 부상한 시기는 5세기다. 고구려는 400년에 광개토태왕이 신라의 구원 요청을 구실로 동해남부 연안까지 군대를 파견해 신라를 압박했다. 이후 두 나라는 동해중부 해안에서 자주 충돌했으나, 5세기 말에는 강릉, 삼척, 울진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됐다.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고구려로서는 중간 거점인 울릉도와 독도를 항해 물표로 활용하면 안정성이 높을 뿐 아니라,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사용할 수 있어 항해거리가 짧아진다. 고구려가 516년, 540년에 각각 왜국에 파견한 사신단은 동해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신라는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이 강해져 북진정책을 취하고, 실직주(삼척)를 설치한 뒤 김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이사부는 신라 왕족이었으며, 성이 김씨였기에 ‘김이사부’라 일컫는 게 합당하다).
신라는 울릉도·독도와 주변 해역을 영토로 삼은 우산국을 복속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김이사부는 512년 하슬라주 군주로 옮긴 후 전쟁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파도가 잔잔해지는 음력 6월에 수군을 동원해 동해를 건넜다. 그는 우산국 사람들이 사납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쉽게 항복시킬 수 있는 꾀를 냈다. 즉 나무로 사자(목우사자)를 많이 만들어 함선에 싣고 접근한 뒤,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무시무시한 광경을 처음 본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곧 항복했다. 이 나무사자들이 불교의 힘을 상징한 것인지, 독특한 전함을 의미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신라는 왜와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전함들을 수리한 기록도 있으며(467년), 병선을 병부에서 직접 관리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목우사자’는 신형 전함일 가능성도 있다. √ 기억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