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기대'

민감한 금융시장 이슈의 경우 안건과 회의록이 공개되면 오히려 시장 혼란을 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전직 금융당국 관계자는 “특정 기업에 대해 논의한다는 내용이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주식·채권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할 것”이라며 “비공식 논의를 위한 별도 간담회를 따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2025년 7월 14일 자 한국경제신문-
이재명 정부가 경제부총리와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 당국 수장들이 비공개로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거시경제·금융 현안 간담회(F4 회의)의 안건 및 회의록 공개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정책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것이 정부 측 생각이지만 시장에선 “시장 혼란만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데요, 왜 이런 우려가 나오는 걸까요. 중요한 정책을 꼭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시장이 얼마나 똑똑한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 경제학자 유진 파마 시카고대 교수가 주창한 ‘효율적 시장 가설’은 금융시장에서 자산의 가격이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투자자는 공개된 정보를 바탕으로 초과수익을 얻기 어렵고, 시장가격은 오로지 새로운 정보에 의해서만 변동합니다.
정보가 공개되기만 하면 시장이 즉시 반영하기 때문에, 정책 효과도 정보의 공개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민감한 정보는 공개 자체만으로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지요. 한편으론 중요한 정보가 미리 공개될 경우 필요한 시점에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역대 정부는 ‘녹실회의’, ‘서별관회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비공개회의를 열며 산업구조조정 등 민감한 이슈를 논의해왔습니다.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반도체 구조조정(1998년), 양자 구도였던 국적 해운사를 HMM 한 곳으로 단일화한 2016년 해운업 구조조정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이들 안건을 정부가 비밀에 부쳐 논의하면서 당시 ‘깜깜이 구조조정’이란 비판이 일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정부는 “정보 공개가 불필요한 시장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대응해왔지요.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르면 당국이 특정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투자자들은 ‘이 기업에 문제가 있나?’로 생각하고 주식을 팔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는 주가 폭락으로 이어지고, 어쩌면 살리려는 기업의 회복을 더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낳을 수 있지요.
효율적 시장 가설은 경제학에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합리적 기대 이론’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합리적 기대 이론은 가계, 기업, 투자자 등 경제주체들이 미래를 예측할 때 과거의 경험뿐 아니라 현재 이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합리적 기대’를 형성하고, 이에 따라 미리 행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앞으로 금리를 인상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전통적인 기대 이론에서 정부는 금리를 내리면 소비·투자가 촉진되고, 이를 통해 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합리적 기대하에서 경제주체들은 “정부가 금리를 내린다는 것은 경기가 나쁘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경기가 좋지 않을 테니 되려 기업은 투자를 망설이고, 가계는 지갑을 닫고 저축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금리를 내렸지만 소비와 투자가 오히려 위축되는 등 정책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는 정부가 정책을 시행할 때 목표에 따라 정보 공개 여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한국은행은 통화 안정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합리적 기대 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한국은행은 연 8회 금융통화위원회 회의를 통해 기준금리를 결정하는데요, 회의 직후 한은 총재가 기준금리 결정 배경 등에 대해 설명하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한은이 바라보는 경제 상황과 금리 결정의 배경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은은 중앙은행이 의도하는 정책금리 향방을 직간접적으로 제시하는 ‘포워드 가이던스(사전 안내)’를 하기도 합니다. 통화정책의 방향성을 미리 알려 시장이 그에 맞춰 움직이도록 시간을 줘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본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수록한 ‘의사록’은 2주일이 지난 뒤 공개합니다. 회의 내용을 즉시 공개하면 시장이 과민하게 반응할 수 있고, 정책의 실질 효과가 줄어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이걸 보면 한은은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경제주체들의 ‘기대’를 둘러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셈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정보의 투명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모든 정보를 즉시 공개하는 것이 항상 옳은 선택은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금융시장처럼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분야에서는 비공개 논의와 신중한 정보 관리가 오히려 더 효과적인 정책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 정부 정책을 접할 때 “왜 지금 이 정보를 공개했을까?”는 질문을 해본다면 경제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NIE 포인트

2. ‘기대’가 정책 효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자.
3. 민감한 경제정책은 언제 공개하는 게 타당할지 고민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