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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725호 2021년 10월 11일

국어와 영어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단기필마''와 ''애매모호''…같으면서 다른 점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조조 군에 갇힌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오는 대목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장면이다. 말 한 필에 의지해 홀로 적진을 돌파하는 조자룡의 위용은 ‘단기필마’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이 말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이하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단기+필마’의 결합인데, 합성어로 처리되지 않았다.
둘 다 겹말이지만 사전 처리는 서로 달라
대신에 ‘단기’와 ‘필마’가 각각 따로 올라 있다. 단기(單騎)는 ‘홑 단, 말탈 기’ 자다. 혼자서 말을 타고 감을 뜻한다. 필마(匹馬)는 한 필의 말을 가리키는데, 주로 ‘필마로’ 꼴로 쓰여 이 역시 혼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나타낸다. 단기나 필마나 같은 뜻인 셈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예전에 국어 고전 시험에 자주 등장하던 야은 길재의 시조 ‘오백 년 도읍지’다. 고려 말 충신이 옛 수도인 개성을 돌아보며 망국의 한을 읊은 이 시조에서 ‘필마’의 전형적인 쓰임새를 엿볼 수 있다.

‘단기필마’는 잉여적 표현이지만, 이런 형태의 겹말은 눈치 채기도 어렵고 쓸 때 어색함도 별로 없다. 이에 비해 ‘애매모호’는 오래전부터 대표적인 겹말 표현으로 지목돼 논란이 컸다. 더구나 ‘애매’는 일본어투라는 누명까지 따라다닌다. 잘못 알려진 국어상식의 하나지만, 그 여파로 일각에선 지금도 이 말을 기피 대상으로 여긴다. 우리말 하나에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은 셈이다.

애매(曖昧)는 희미해 분명치 않음을 뜻한다. 모호(模糊) 역시 흐리터분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의미상 겹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에서는 여러 차례 ‘일본어투 용어 순화자료집’을 펴낸 적이 있는데, 이들 목록에 ‘애매’는 보이지 않는다. ‘애매’를 일본에서 온 한자어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매모호’가 일본어투라는 주장 근거 없어
오히려 문맥에 따라 ‘애매’가 ‘모호’보다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가령 “내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처지(또는 형편)다” 같은 데서는 ‘애매’가 제격이다. ‘처지’나 ‘형편’을 ‘모호하다’라고 하면 어색하다. 이에 비해 ‘의견/주장/설명/태도’ 등에는 ‘모호’가 어울린다. “이 조항은 의미가 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할 때 적절하다.

한자어 ‘애매(曖昧)하다’와 고유어 ‘애매하다’(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아 억울하다. “애매하게 누명을 썼다.”)도 구별해야 한다. 고유어 애매하다는 줄어 ‘앰하다’로 쓰인다. 관형사 ‘애먼’(억울하거나 엉뚱하게 화를 입는)도 여기서 전성한 말이다. 그러니 ‘애매한 사람 잡지 마라’(애매하다의 관형형)나, ‘앰한 사람~’(준말의 관형형)이나, ‘애먼 사람~’(전성 관형사)이나 모두 가능한 표현이며 같은 뜻이다. 간혹 이를 ‘엄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엄(嚴)하다’는 ‘엄격하고 철저하다’란 뜻의 다른 말이다.

단기필마와 애매모호는 둘 다 겹말 표현이지만 사전에서의 대접은 서로 다르다. 언중이 받아들이는 위상도 제각각이다. 단기필마는 사전에 없지만 사용하는 데 거부감 없이 누구나 쓴다. 이에 비해 애매모호는 사전에 단어로 올랐음에도 일본어투라는 누명을 쓴 채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심지어 배척당하거나 기피되기까지 한다. 현실언어를 많이 수용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는 ‘단기필마’를 표제어로 올렸다. ‘애매모호’에 따라다니는 겹말 시비나 일본어투 오해도 빨리 벗어던져야 할 때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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