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표현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100년간 써온 '기대난망', 사전에 없는 까닭
“애초 집단면역은 기대난망이었는지 모른다”라고들 한다. “미친 집값 잡기, 정녕 기대난망인가?” 이런 제목의 신문기사도 눈에 띈다. 끝모를 코로나19 사태로 사회 분위기가 가라앉은 탓인지 ‘기대난망’이란 말을 자주 접한다. 그런데 이 말은 좀 특이한 구성이다. 국어사전에 나오지도 않는다. ‘기대’와 ‘난망’이 결합해 의미상 중복 표현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상적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에는 ‘기대난’(期待難: 기대하기 어려움)과 ‘난망’(難望: 바라기 어려움)이란 말이 따로 있다. 기대하는 것은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대난이 곧 난망이다. 망(望)이 ‘바랄 망’ 자다. 두 말을 섞어 ‘기대난망’을 만들었으니 겹말에 해당한다. ‘동해 바다’가 의미중복 표현인 것과 같다.기대난망이든 기대난이든 난망이든 이들이 사전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초의 국어대사전인 《조선말큰사전》(한글학회, 1957년)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근인 ‘기대’만 있을뿐 아직 기대난이나 난망이란 말이 생성되기 전이라고 짐작할 만하다. ‘-난(難)’은 취업난, 공급난 등에서 보듯이 ‘어려움’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그러니 ‘기대난’은 파생어라 굳이 사전에 없어도 조어법상 만들어 쓸 수 있을 것이다.《표준국어대사전》(1999년)에는 ‘기대난’이 표제어로 등장한다. ‘난망’은 그보다 이르게 1991년 발간된 《금성판 국어대사전》에서 올림말로 다뤘다. 이때 ‘난망’의 용례로 ‘기대 난망’을 제시했다. ‘기대 난망’이 하나의 단어가 아니라 구의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단기필마'와 '애매모호'…같으면서 다른 점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조조 군에 갇힌 유비의 아들을 구출해오는 대목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장면이다. 말 한 필에 의지해 홀로 적진을 돌파하는 조자룡의 위용은 ‘단기필마’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이 말은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이하 표준국어대사전 기준). ‘단기+필마’의 결합인데, 합성어로 처리되지 않았다. 둘 다 겹말이지만 사전 처리는 서로 달라대신에 ‘단기’와 ‘필마’가 각각 따로 올라 있다. 단기(單騎)는 ‘홑 단, 말탈 기’ 자다. 혼자서 말을 타고 감을 뜻한다. 필마(匹馬)는 한 필의 말을 가리키는데, 주로 ‘필마로’ 꼴로 쓰여 이 역시 혼자서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나타낸다. 단기나 필마나 같은 뜻인 셈이다.‘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예전에 국어 고전 시험에 자주 등장하던 야은 길재의 시조 ‘오백 년 도읍지’다. 고려 말 충신이 옛 수도인 개성을 돌아보며 망국의 한을 읊은 이 시조에서 ‘필마’의 전형적인 쓰임새를 엿볼 수 있다.‘단기필마’는 잉여적 표현이지만, 이런 형태의 겹말은 눈치 채기도 어렵고 쓸 때 어색함도 별로 없다. 이에 비해 ‘애매모호’는 오래전부터 대표적인 겹말 표현으로 지목돼 논란이 컸다. 더구나 ‘애매’는 일본어투라는 누명까지 따라다닌다. 잘못 알려진 국어상식의 하나지만, 그 여파로 일각에선 지금도 이 말을 기피 대상으로 여긴다. 우리말 하나에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은 셈이다.애매(曖昧)는 희미해 분명치 않음을 뜻한다. 모호(模糊) 역시 흐리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백주대낮'은 곧 '벌건 대낮'이죠
“이제 더 이상 이런 불법폭력이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개혁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제1야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이른바 강성 귀족노조로 알려진 노동단체를 비판하며 언급한 대목이다. 정치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문장 안에 쓰인 ‘백주대낮’이란 표현이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좀 어색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백주대로’를 비틀어 ‘백주대낮’이라 말해이 말을 꽤 자주 접한다. “백주대낮에 이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주대낮에 버젖이 거짓말하다니….” 그런데 막상 사전을 찾아보면 ‘백주대낮’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원래 ‘백주대로’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비틀어 변형된 형태로 쓴 것이기 때문이다.실은 사전에 ‘백주대로’란 말도 없다. ‘백주’와 ‘대로’가 각각의 단어로 있을 뿐이다. 백주(白晝)란 ‘환히 밝은 낮’을 뜻한다. 순우리말로는 ‘대낮’이다. ‘백주의 강도 사건’ ‘술에 취해 백주에 대로를 활보한다’ 식으로 쓴다. 그러고 보면 주로 부정적인 문맥에서 쓰인다. 용례가 다 그렇다. ‘대로(大路)’는 말 그대로 크고 넓은 길이다. 고유어로 ‘큰길’이라고 한다. 이 두 말이 어울려 ‘백주 대로에…’ 같은 표현이 나왔다. 한 단어가 아니라서 붙여 쓰지 않고 띄어 쓴다. 당연히 사전 표제어에는 없고 각각의 단어가 따로 올라 있다.그럼 왜 이 ‘백주 대로’가 ‘백주대낮’으로 바뀌어 나타날까? 고유어 ‘대낮’은 ‘환히 밝은 낮’을 뜻한다. 한자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북한의 극존칭 어투 '~께서와'
지난 호에 이어 북한말 가운데 특이한 어법을 좀 더 살펴보자. “김정은 동지께서와 문재인 대통령은 회담에 상정된 의제들에 대하여 견해 일치를 보시고 앞으로 수시로 만나….” 2018년 4월 28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남북한 정상 간의 ‘판문점선언’을 전문(全文)과 함께 그 의미를 상세하게 보도했다.체제적 특성이 우리말 용법에 영향 끼쳐주목할 부분은 ‘김정은 동지께서와 문재인 대통령은…’에서 드러나는 어색한 우리말 용법이다. 우리 관점에서는 비문이다. 북한의 유일 영도체제가 국어 어법에 영향을 끼친 모습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북에서는 모든 출판물에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관련된 얘기가 많이 나온다. 눈여겨볼 것은 이들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극존칭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수령님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께서는~’ 하는 식이다. ‘와’는 대등한 낱말을 연결하는 조사다. 존칭 조사를 붙일 때는 ‘A와 B께서는’과 같이 뒷말에만 붙이는 게 자연스러운 우리 어법이다. 그러나 북에서는 이른바 ‘최고 존엄’에 대해 항상 극존칭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처럼 부자연스러운 어투라도 써야만 한다. 체제적 특수성이 우리말 표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볼 수 있다.북한의 언론이나 교과서 등 출판물을 분석해 보면 남한에 비해 전반적으로 문장 구성과 표현 기법이 뒤처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에서는 밀려드는 외래어와 자고 나면 튀어나오는 신조어로 계층 간, 세대 간 ‘소통’을 걱정해야 할 판이지만, 북에서는 폐쇄적 체제 특성으로 말글 발달에서도 지체 현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