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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개종하면 세금 면제"…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과 면세 카드

    그리스도교는 일요일에 예배를 본다. 유대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는다. 이슬람의 대예배일은 금요일이다. 그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무얼 할까. 서로 싸운다. 내내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말하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들이 죽여놓고 신의 승리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싸우는 건지 싸우기 위해 종교를 개발한 건지 모르겠다. 셋 중 가장 최신 종교가 이슬람이다. 무함마드가 마흔이 되던 610년 첫 번째 계시가 들려온다. 산에서 돌아온 무함마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살 연상인 아내는 기뻐하며 무함마드가 민족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포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1년 동안 무함마드의 말에 넘어간 사람은 가족, 친구, 친척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까지 70여 명이 전부였다. 보험판매업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팔고 난 뒤부터가 진짜 실력이다. 포교도 마찬가지. 70여 명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얼굴을 봐서 그냥 믿어주기로 했을 뿐이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친척이니까(심지어 숙부도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일단 무함마드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맞지 않았다. 약탈과 보복 전쟁이 일상인 사막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아랍인은 과음(過飮)과 과음(過淫)으로 불안을 잊었다. 그런데 도덕적이고 순종하는 삶이라니. 게다가 무함마드가 하는 이야기는 별로 신선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지금의 예멘 지역)에 ‘힘야르’라는 왕국이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후 525년까지 존속했는데, 이 왕국이 유대교를 믿는 왕국이었다. 왕국 바로 위가 무함마드가 살던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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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퉁 제국'이 남긴 건 인종청소와 헬게이트

    남의 나라의 의사결정을 대신 해주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말이 아니다. 제국을 뜻하는 ‘empire’는 라틴어 동사 ‘imperare’에서 파생한 말로, 원래 의미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다. 그렇다고 제국을 지배와 권리 대행의 폭압적 존재, 영토와 자원에 환장한 약탈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제국은 아무리 강성해도 문 닫는 데 한 세기도 걸리지 않는다. 제국은 식민지에 ‘제약’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지배당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굴종의 스트레스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을 때 제국은 첫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여기에 포용과 관용이 토핑되면서 비로소 롱런 가도에 진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피정복 민족을 동물이나 식물 다루듯 하라고 조언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조언대로 했더라면 그의 제국은 암살과 폭동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 이념은 윤택하고 편리한 생활 방식의 유혹이었다. 알프스 북쪽과 지중해 서쪽의 식민지들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대신 도시와 목욕과 청결을 얻었다. 윈스턴 처칠이 로마가 브리타니아에 상륙했을 때 드디어 영국에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겠다. 중세 끝 무렵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대륙과 대륙에 걸친 제국이 다시 등장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봉쇄하자 “지중해만 바다냐 대서양도 바다다” 하며 서쪽으로 훌쩍 나가버린 일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개막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문명사적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헬 게이트가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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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면 남는장사…배상금 뜯어내며 침략전쟁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서구식 내각 제도를 수립하고 초대 총리로 취임하는 1885년까지 일본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근대화에 매진했다. 성실하게 두 번의 내전(보신 전쟁·세이난 전쟁)을 치렀고, 성실하게 구미(歐美)를 베끼며 내치를 다졌다. 이제 그만 성실해도 되련만 이들에게 뒤늦게 ‘중2병’이 찾아오면서 일본은 갑자기 성실한 불량 학생이 된다. 정한론(征韓論)으로 시작된 힘 자랑과 욕심 채우기를 전쟁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펼친 것이다. 외우기 편하게 이들은 10년 단위로 큰 전쟁을 치렀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세계대전이다. 전쟁 목록은 이게 다가 아니다. 큰 전쟁 사이마다 작은 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간에 타이완 정복전쟁과 의화단 전쟁을 치렀고,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제국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병 투쟁을 진압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주도 성장은 계속된다. 세계대전이 휴전 상태로 접어든 1918년에는 시베리아로 출병해 1922년까지 주둔했고(남들은 다 철수),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대망의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전쟁으로 흥했다가 전쟁으로 망한 ‘전흥전망’의 나라가 19세기 말, 20세기 중반의 일본이다. 전쟁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은 아편전쟁에서 배웠다. 자기들이 먼저 침략해놓고 상대가 반항하면 이를 진압한 뒤 배상금을 받아내는 수법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챙긴 배상금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면서 받은 환부금 포함 3억6000만 엔이다.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3~5년 치인데(재정 규모가 7000만 엔에서 1억 엔까지 책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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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포용 통해 헬레니즘 확산시켜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기술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런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 말은 나도 한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남은 생의 절반을 기꺼이 투척할 용의가 있다. 비슷한 용례인데, 이 사람의 말로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를 찾아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처럼 되었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는 절대 디오게네스처럼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고 검소하게 먹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서는 아침을 적게 먹어야 하고, 맛있는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야간 행군을 하는 게 최고다.” 세상에 언제나, 영원히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은 없다. 음식 맛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는 배가 얼마나 고픈지와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맛이 있고, 병이 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절대 그 맛을 즐기지 못한다. 음식과 맛에 대한 세련된 통찰인데, 왜 하필 예로 든 게 야간 행군일까. 그는 전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에게 저녁이란 대부분 다음 날 전투를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그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치를 전투(사람 죽일 것)를 생각하면 흥분이 돼서 그랬다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염통이 쫄깃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소년 시절 그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아버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위대한 두뇌를 모셔 온 것이다. 독(獨)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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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거덜 낸 펠로폰네소스전쟁…페르시아만 '빙긋'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암살당했을 때 이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달 뒤 일곱 나라가 연달아 선전포고를 주고받으며 상황이 험악해졌을 때도 전쟁이 해를 넘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전선으로 가는 군용열차 앞에서 젊은이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약간 ‘빡센’ 군사훈련 정도로 여긴 전쟁은 그러나 5년을 끌면서 지옥이 됐고, 전선에 투입된 병사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촉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오래된 책 한 권을 불러냈다. 고대 그리스 내전을 다룬 투키디데스의 다. 깜찍하게도 토인비는 그 오래된 전쟁에서 세계대전의 원인을 찾아냈다. 급부상하는 독일이 기존 패권국인 영국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 끝에 발생한 사건이라는 설명이었다.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이 걸음마 단계이던 시절이다. 가설로는 그럴듯했지만 어딘지 어설펐던 그의 주장은 제2차 대전을 거치고 냉전이 펼쳐지면서 우세 학설이 된다. 기존 패권국이 신흥 강국의 팽창을 견디지 못한다는 이 이론은 저자의 이름을 따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 불렸고, 현재는 주로 미·중 갈등을 염려할 때 동원된다. 개인적으로는 살짝 마뜩잖다. 영국과 미국처럼 평화적인 패권 이양이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앵글로색슨 대서양 동맹 사이에서 벌어진 예외적인 상황이다. 예부터 패권국과 후발 강국의 군사적 충돌은 늘 있었고, 이를 피해 간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표현보다는 ‘투키디데스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다. 차라리 함정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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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들에 "지켜줄테니 세금 내라" 겁박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풀꽃만 그런 게 아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 그리스가 그랬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인도의 접경,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한 땅 부자 페르시아에 영토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지중해 무역을 위해 제국의 서쪽 연안 이오니아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다리우스는 전면적인 전쟁 대신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을 하나씩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페르시아의 황금은 언제나처럼 유능했다. 재물이 흘러 들어가자 이오니아 폴리스는 분열했고 곳곳에서 친(親)페르시아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어디에나 삐딱선은 있다. 불필요한 종족주의로 충만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反)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난다.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참교육을 하는 것은 제국의 기본 업무 아니던가. 페르시아의 창칼 아래 600년 역사의 밀레투스는 폐허로 변했고 시민들은 모조리 노예 신세가 된다. 사람이 하나를 얻으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라는 나라를 잘 몰랐다. 장군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게 어디 있는 나라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런데 차지하고 보니 예뻤다. 그리스 본토에도 흥미가 생겼고 게다가 미운 폴리스가 있었다. 밀레투스가 페르시아에 대들 당시 지원군을 보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다. 탐도 나고 괘씸하기도 해서 다리우스는 아테네 정벌을 결심한다. 물론 전쟁 안 하고 협박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면 최고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에 사절단을 보낸다. 항복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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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제국 영국 만든 건 세금혁명과 해적질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사슴 사냥을 한다고 꺅꺅대며 들판을 뛰어다니는 땅. 얼굴에 괴상한 페인트칠을 한 노인들이 질퍽한 땅에 주저앉아 진흙처럼 보이는 걸쭉한 액체를 들이켜는 풍경.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인으로는 최초로 브리타니아에 상륙했을 때 그는 충격을 넘어 절망감을 느꼈다. 신이여, 이런 곳이 정말 당신이 창조한 땅이고 저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입니까. 그로부터 1800년이 흐른 뒤 이 야만인들이 영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걸쭉한 액체가 에일 맥주라는 상표로 전 세계인이 즐겨 마시는 음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고상한 로마인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문명의 변방이던 이 나라가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선 기원을 보통은 산업혁명(공업화)에서 찾는다. 원인과 결과가 바뀌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에 세계 제국이 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제국이었기에 산업혁명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미 영국은 자금력이 탄탄한, 유럽의 경제적 강자였다는 말씀이다. 영국의 자본 축적은 두 가지 경로로 이뤄졌다. 하나는 거국적인 해적질이다. 인류가 바다로 나간 날 시작된 게 해적의 역사다. 다른 나라라고 해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 차원에서 해적질을 장려한 나라는 영국이 유일하다. 해적이라고 하니 배 몇 척 끌고 다니는 꾀죄죄한 무리를 연상하기 쉽다. 전혀 아니다. 약탈보국의 기수였던 드레이크는 20척 이상의 함대에 무장한 병력 2500명을 싣고 다녔다. 해적이 아니라 해군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집권 초반 영국은 가난이 보편인 나라였다. 인민은 밥을 굶어도 왕실은 좀 사는 게 보통이다. 영국은 왕실까지 가난했다. 국왕에게는 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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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유 달려간 '아줌마'…루이 16세 끌어내려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의 프랑스 ‘아줌마’들이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궁전으로 행진을 시작한다. 아줌마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성 비하 의도가 아니라 이 집단의 뉘앙스를 살리는 데 이만한 단어가 없어서다. 이들은 파리의 생선 장수였다. 억척스럽고 힘까지 좋은 이 근육질 아줌마들이 생선 다듬는 칼을 들고 20㎞에 달하는 행진을 벌인 것은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조언했다는 루머가 파리 시내에 퍼졌고, 그 말에 ‘꼭지’가 돌아버렸기 때문이다. 베르사유를 포위한 이들은 여섯 명의 대표를 뽑아 루이 16세에게 면담을 요구한다. 접견실로 왕이 들어오는 순간 이 중 한 명이 충격과 감동으로 기절한다. 말로만 듣던 왕을 처음 본 데다 루이 16세의 풍채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은 국민회의가 결의한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던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기어이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사태는 루이 16세가 자초했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군주의 취미생활이다. 무려 72년 집권 기간 중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낸 태양왕 루이 14세는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원금만 20억리브르라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사망한다. 유능하지도 않으면서 취미생활은 포기하지 않았던 루이 15세는 이익이 불분명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끼어들어 또 빚을 늘렸고, 루이 16세에 이르면 정부 수입의 대부분이 이자를 무는 데 들어갔다. 선대를 보고 반성할 만도 한데 그 역시 취미생활을 화끈하게 했다.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20억리브르를 쏟아부은 것이다. 20억리브르는 3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