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산업혁명은 우연의 산물?
1750년대 들어 석탄을 태워 열에너지로 활용
석탄 '운 좋게' 보유한 英, 급속도 경제성장
中·네덜란드, 능력 있었지만 인근 석탄층 부재
1800년 세계 농업 3분의 2 담당한 중국·인도
공업 사회로의 전환 흐름 놓치며 도태
한국은 건국 70년 만에 원조받는 국가에서 원조 주는 나라가 되었다. 이 말은 내가 아는 것 중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명하는 가장 식상한 표현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미국과 전쟁을 해서 사흘을 버틸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 다소 과장되고 극단적이기는 해도 훨씬 실감 난다. 도대체 대한민국은 왜 이렇게 수직으로 상승했을까. 국민이 근면해서, 지도자를 잘 만나서 등등의 이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각국, 국민이 근면한 나라는 허다하고 뛰어난 지도자는 그보다 더 많다. 1945년 직후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독립 전 수준에서 몇 걸음 나아가지 못했다. 이때 실패의 원인으로 단골로 불려 나오는 게 부패한 지도자다. 틀렸다. 결과만 보니까 그렇다. 그 리더들은 부패하고 싶어 부패한 게 아니다. 생각대로 세상이 안 움직이니까, 뭘 해도 안 되니까, 발버둥 쳐 봐야 발만 아프니까, 무능하여 절망한 끝에 부패한 거다. 작정하고 부패한 지도자를 찾는 것은 탁월한 지도자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노력보다 재능, 재능보다 운사석에서 친한 경영학과 교수께 이런 얘기를 들었다. 망한 기업이 그리된 이유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단다. 그러나 기업이 성공한 이유를 물으면 솔직히 모르신단다. 그냥 된 거란다. 물론 공식 자리에서는 절대 이렇게 말씀 안 하신다. “탁월한 감각과 기업가 정신이 빚어낸 결과”가 선생님의 공식 답변이다. 무책임과 비논리적 통찰 사이의 이 대답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우연히’다. 우연히 성공했을 뿐 노력은 다 엇비슷했다는 얘기다. 우연히는 ‘운 좋게’로 바꿔 써도 크게 이상하지 않겠다.1750년대 들어 석탄을 태워 열에너지로 활용
석탄 '운 좋게' 보유한 英, 급속도 경제성장
中·네덜란드, 능력 있었지만 인근 석탄층 부재
1800년 세계 농업 3분의 2 담당한 중국·인도
공업 사회로의 전환 흐름 놓치며 도태
한때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을까’ 같은 제목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내 동양에 밀리던 서양이 불과 200년 만에 역전한 까닭을 분석했는데, 현학적 설명을 다 걷어내면 결국 서구는 인종적·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우월하고 동양은 전 부문에서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게 결론이다. 동양이 열등하다고? 정말로? 1400년대 전 세계에서 25개 대도시 중 9개가 중국에 있었다. 금·은·동메달은 중국의 난징, 인도의 비자야나가르 그리고 이집트의 카이로 순이다. 25개 중 유럽 도시는 5개뿐이었다.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유럽이 우월했다고 절대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인구와 생산성으로 전근대 세계 제패한 중국과 인도하나 더, 중세에서 근대 초입까지는 인구가 국력의 바로미터다.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추가적 자원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1800년 세계 인구에서 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율은 67%였다. 그리고 그 인구로 중국과 인도는 전 세계 경제 생산의 3분의 2를 담당했다. 생산성은 더 압도적이다. 당시 인도에서 파종된 씨앗과 수확량의 비율은 1 대 20이었다. 영국은 겨우 1 대 8. 신세계에서 엄청난 금과 은이 유입됐음에도 유럽은 인구와 생산성을 앞세운 아시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동양의 호시절이다.런던 인근 석탄 광맥이 잠자고 있던 영국1800년부터 100년이 지나는 동안 유럽과 미국은 부의 축적에서 중국과 인도를 밀어내고 그들의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중요한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산업혁명이다. 그러나 이 성공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석탄이라는 우연’이다. 1750년 전 세계 7억5000만 명의 인구는 동일한 조건에서 생활했다. 식량, 의복, 거주지 등 모든 생필품은 토지에서 나왔다. 에너지는 태양이 뿜어내는 열에 의존했다. 보통 ‘생물학적 구(舊)제도’라 부른다. 이 상황은 1750년대에 들어 사람들이 석탄을 때 얻은 그 열에너지로 증기기관을 사용하면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 석탄은 수백만 년 전부터 땅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누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는지는 순전히 ‘우연’이다. 일부 석탄층은 석탄이 필요하고 그 사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묻혀 있었다. 다른 일부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국과 네덜란드는 석탄 산업을 발전시킬 충분한 능력이 있었지만 인근에 석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엄청난 석탄층을 ‘우연히’ 혹은 운 좋게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1800년 영국은 전 세계 석탄 생산량의 90%에 달하는 1000만 t의 석탄을 생산했다. 이어 석탄을 사용하는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영국 경제를 단독으로 생물학적 구제도에서 탈출하게 만든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공 원인은 5000만 년 만에 처음 찾아온 국운이다. 어쩌다 독립이 됐고, 우연히 나라가 갈렸으며, 전쟁으로 신분 질서가 해체된 후 냉전이라는 황홀한 상황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이라는 후견인을 업고 체제 경쟁을 벌인 끝에 이렇게 되었다. 산업화 세대를 폄하하는 발언이라고? 이런 질문을 해보자. 우리의 지리적 위치가 아프리카 내륙이거나 동남아시아 어느 끄트머리였어도 이런 발전이 가능했을까. 남북의 군사적 경쟁과 미국·소련의 체제 우월 경쟁 대리전이라는 이중 경쟁이 없었어도 이런 성장이 가능했을까. 우연과 행운이라는 씨줄에 부지런한 민족성과 2명의 뛰어난 지도자라는 날줄이 앉으면서 만들어진 게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단, 그렇다고 ‘우연히’를 ‘적당히’로 확장시키면 곤란하다. 세상에 적당히 해서 되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