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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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타
굶주림이 불러온 혁명…역사가들이 멋지게 포장
성실한 작가와 충실한 편집자가 만든 책을 만나면 고맙다. 그들은 독자가 책을 읽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사방에 친절한 안내문을 붙여둔다. 불성실한 작가와 월급이 목적인 편집자가 만든 책을 만나면 짜증난다. 그들은 제 자랑과 오탈자를 잡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독자의 궁금증은 알 바 아니다. 고대 로마의 공중목욕탕에 관한 책을 읽었다. 한참 내부 시설을 소개하더니 입장료는 1‘콰드란스’란다. 그리고 끝이다. 어쩌라고. 그래서 궁금하면 댁이 직접 인터넷 뒤져서 찾아보거나 평생 모른 채 살라고? 이분은 작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편집자는? 편집자에게는 할 말 없고 출판사 사장님께 말씀드린다. 회사 오래 보전하고 싶으면 이 인간부터 자르시라고. 로마에서 유통되는 동전을 값어치 높은 순서대로 보면 아우레우스(금화)→데나리우스(은화)→세스테르티우스(청동화)→두폰디우스(청동화)→아스(구리화)→세미스(구리화)→콰드란스(청동)다. 요기까지 알려주면 끝? 아니다. 더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는 교환 비율이다. 가장 많이 쓰이던 1세스테르티우스는 2두폰디우스고 4아스이며 8세미스고 16콰드란스다.이제 1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를 알려줄 차례다. 1세스테르티우스는 현재 가치로 대략 2유로화로 2700원 정도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 로마의 소비자물가지수를 보자. 올리브유 1L는 3세스테르티우스이니 6유로가 되고 한국 돈으로 8100원이다. 식사용 중급 포도주 1L는 2세스테르티우스로 우리 돈 5400원, 빵 1㎏은 1두폰디우스로 1350원이다. 그러니까 10세스테르티우스 정도면 중산층 가족이 하루를 먹었다는 얘기다. 그럼 공중목욕탕 입장료 1콰드란스는 지금 가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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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유일한 여왕…'전쟁 천재'를 이기다
한국전쟁 때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면서 날아가는 ‘쌕쌕이’ 전투기를 보며 어른들은 한마디씩 했다. “아따, 그래도 사위 나라라고 신경 좀 썼구먼.” 민도(民度)가 다소 저조하다 보니 당시 전투기를 보낸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나라 오스트리아를 혼동해 벌어진 에피소드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여전히 낮다. 한때 유럽의 5대 강국이었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그런데 설명하기가 까다롭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합스부르크 가문과 신성로마제국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쉽다. 부르봉가와 함께 유럽의 가장 유명한 왕실 가문인 데다 주걱턱을 합스부르크 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까닭이다(엄밀하게는 아래턱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위턱이 들어간 상태).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이다. 중세 유럽사를 따라 여행할 때 수시로 튀어나와 사람을 괴롭힌다. 지도에도 안 나오는데 대체 어디 있는 나라야?현재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에 걸쳐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 점포가 입점해 있는 ‘매머드 상가’로 이해하면 된다. 이 상가 입구에 걸려 있는 간판이 신성로마제국이다. 상가에는 떡볶이 가게처럼 매장도 작고 매출도 그저 그런 점포가 있는가 하면 보석이나 명품 브랜드를 취급하는 거만한 매장도 있다. 거만한 매장은 입주자 대표회의를 구성하면서 군소 업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매장 크기가 넓고 당연히 임차료도 많이 내는 자신들만이 상가의 대표를 뽑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유력 매장들이 선제후(選帝侯)다. 이 선제후들이 뽑은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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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후 獨(독일) 혐오…왕조명 바꾼 독일계 英 왕실
왕조(王朝)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는 업적이 아니라 얼마나 버텼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윈저 가문의 생명력은 경이적이다.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꿩 사냥과 우표 수집 말고는 특기가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왕조사(史)의 측면에서 그는 위대한 군주였다. 추풍낙엽처럼 유럽 왕가가 몰락할 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베토벤과 바흐가 금지되고 독일산이라는 이유로 닥스훈트가 집에서 쫓겨났다. 영국 왕실에는 더더욱 최악인 게 전쟁을 일으킨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사촌이었고, 무엇보다 영국 왕실 자체가 독일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윈저라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름으로 성씨 세탁을 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다. 혈통을 지워버린 조지 5세는 매일 거리로 나가 국민들을 만났고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영국 왕실에 독일 혈통이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아들이 없었고, 왕위는 메리의 여동생 앤이 물려받는다. 구교와 신교가 엎치락뒤치락 피를 주고받는 일이 지긋지긋했던 영국 의회는 왕의 혈통을 신교로만 잇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러다 보니 앤의 후계자로 불려온 것이 독일의 하노버 공작이다. 영어가 서툴러 신하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했던 이 사람이 조지 1세로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왕조의 이름이 바뀐다. 여왕의 남편 앨버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의 독일인이었고, 이 이름이 윈저 왕가의 바뀌기 전 왕조명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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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메카 가는 길은 천년의 대박 아이템
지금은 관광으로 먹고살지만 베네치아는 한때 세상의 물류를 쥐고 흔들던 해상 제국이었다. 15세기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베네치아의 알짜 사업이 순례선단 운용이다. 물자 대신 사람을 실어 날랐으니 그게 그거긴 하지만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 파편을 모신 예루살렘 성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기독교도들의 꿈을 사업으로 승화시킨 ‘촉’하나만은 알아줄 만하다. 물론 이전에도 순례자는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루트도 존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경쟁자들을 제치고 순식간에 업계 1위를 달성한다. 비결은 베네치아만의 독보적 순례 패키지였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쉬운 시대가 아닌 데다 절차는 복잡하고, 순롓길에 오른 동안 몇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 리는 순롓길. 이에 베네치아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통행증과 허가증, 그리고 숙박과 통역 등의 서비스 일체를 제공했다. 여행 허가증은 셋이다. 교구 사제가 발행하는 허가증, 교황이 발부하는 허가증, 그리고 마지막이 시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이다. 교황의 허락 없이 순례를 갔다가는 파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를 발부받으려면 로마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기독교도가 맘루크 제국까지 허가증을 받으러 간다? 명백히 미친 짓이다. 베네치아 패키지를 이용하는 사람은 이 중 교구 사제 허가증만 받아오면 됐다. 베네치아는 교황과 맘루크 제국의 허가증을 책임졌고(수수료가 오간 것은 물론이다) 순례자가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순례선단 사업 독점 150년 동안 매년 수천 명이 순례를 위해 베네치아를 찾았다. 1인당 운임은 그 시기 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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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종하면 세금 면제"…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과 면세 카드
그리스도교는 일요일에 예배를 본다. 유대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는다. 이슬람의 대예배일은 금요일이다. 그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무얼 할까. 서로 싸운다. 내내 싸워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말하지만 그게 지켜지는 일은 별로 없다. 자신들이 죽여놓고 신의 승리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싸우는 건지 싸우기 위해 종교를 개발한 건지 모르겠다. 셋 중 가장 최신 종교가 이슬람이다. 무함마드가 마흔이 되던 610년 첫 번째 계시가 들려온다. 산에서 돌아온 무함마드는 아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살 연상인 아내는 기뻐하며 무함마드가 민족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포교 성적은 형편없었다. 1년 동안 무함마드의 말에 넘어간 사람은 가족, 친구, 친척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하인까지 70여 명이 전부였다. 보험판매업은 가족과 친척들에게 팔고 난 뒤부터가 진짜 실력이다. 포교도 마찬가지. 70여 명은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얼굴을 봐서 그냥 믿어주기로 했을 뿐이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친척이니까(심지어 숙부도 무함마드가 하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일단 무함마드의 설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맞지 않았다. 약탈과 보복 전쟁이 일상인 사막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아랍인은 과음(過飮)과 과음(過淫)으로 불안을 잊었다. 그런데 도덕적이고 순종하는 삶이라니. 게다가 무함마드가 하는 이야기는 별로 신선하지 않았다. 아라비아반도의 남서쪽(지금의 예멘 지역)에 ‘힘야르’라는 왕국이 있었다. 기원전 110년부터 기원후 525년까지 존속했는데, 이 왕국이 유대교를 믿는 왕국이었다. 왕국 바로 위가 무함마드가 살던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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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제국'이 남긴 건 인종청소와 헬게이트
남의 나라의 의사결정을 대신 해주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말이 아니다. 제국을 뜻하는 ‘empire’는 라틴어 동사 ‘imperare’에서 파생한 말로, 원래 의미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다. 그렇다고 제국을 지배와 권리 대행의 폭압적 존재, 영토와 자원에 환장한 약탈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제국은 아무리 강성해도 문 닫는 데 한 세기도 걸리지 않는다. 제국은 식민지에 ‘제약’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지배당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굴종의 스트레스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을 때 제국은 첫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여기에 포용과 관용이 토핑되면서 비로소 롱런 가도에 진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피정복 민족을 동물이나 식물 다루듯 하라고 조언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조언대로 했더라면 그의 제국은 암살과 폭동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 이념은 윤택하고 편리한 생활 방식의 유혹이었다. 알프스 북쪽과 지중해 서쪽의 식민지들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대신 도시와 목욕과 청결을 얻었다. 윈스턴 처칠이 로마가 브리타니아에 상륙했을 때 드디어 영국에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겠다. 중세 끝 무렵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대륙과 대륙에 걸친 제국이 다시 등장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봉쇄하자 “지중해만 바다냐 대서양도 바다다” 하며 서쪽으로 훌쩍 나가버린 일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개막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문명사적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헬 게이트가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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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면 남는장사…배상금 뜯어내며 침략전쟁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서구식 내각 제도를 수립하고 초대 총리로 취임하는 1885년까지 일본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근대화에 매진했다. 성실하게 두 번의 내전(보신 전쟁·세이난 전쟁)을 치렀고, 성실하게 구미(歐美)를 베끼며 내치를 다졌다. 이제 그만 성실해도 되련만 이들에게 뒤늦게 ‘중2병’이 찾아오면서 일본은 갑자기 성실한 불량 학생이 된다. 정한론(征韓論)으로 시작된 힘 자랑과 욕심 채우기를 전쟁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펼친 것이다. 외우기 편하게 이들은 10년 단위로 큰 전쟁을 치렀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세계대전이다. 전쟁 목록은 이게 다가 아니다. 큰 전쟁 사이마다 작은 전쟁이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간에 타이완 정복전쟁과 의화단 전쟁을 치렀고, 러일전쟁 후에는 대한제국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의병 투쟁을 진압했다. 이후에도 일본의 전쟁 주도 성장은 계속된다. 세계대전이 휴전 상태로 접어든 1918년에는 시베리아로 출병해 1922년까지 주둔했고(남들은 다 철수),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대망의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 말 그대로 전쟁으로 흥했다가 전쟁으로 망한 ‘전흥전망’의 나라가 19세기 말, 20세기 중반의 일본이다. 전쟁이 이익이 된다는 사실은 아편전쟁에서 배웠다. 자기들이 먼저 침략해놓고 상대가 반항하면 이를 진압한 뒤 배상금을 받아내는 수법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챙긴 배상금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하면서 받은 환부금 포함 3억6000만 엔이다. 일본 1년 국가 예산의 3~5년 치인데(재정 규모가 7000만 엔에서 1억 엔까지 책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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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포용 통해 헬레니즘 확산시켜
“소크라테스와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애플의 기술을 모두 포기할 수 있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런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전제로 하는 말은 나도 한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남은 생의 절반을 기꺼이 투척할 용의가 있다. 비슷한 용례인데, 이 사람의 말로 알려진 것 중 하나가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를 찾아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내가, 내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처럼 되었을 것이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는 절대 디오게네스처럼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적고 검소하게 먹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위해서는 아침을 적게 먹어야 하고, 맛있는 아침식사를 위해서는 야간 행군을 하는 게 최고다.” 세상에 언제나, 영원히 맛있는 음식 같은 것은 없다. 음식 맛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는 배가 얼마나 고픈지와 몸이 얼마나 건강한지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맛이 있고, 병이 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절대 그 맛을 즐기지 못한다. 음식과 맛에 대한 세련된 통찰인데, 왜 하필 예로 든 게 야간 행군일까. 그는 전쟁을 너무나 사랑했고 그에게 저녁이란 대부분 다음 날 전투를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투 전날 그는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치를 전투(사람 죽일 것)를 생각하면 흥분이 돼서 그랬다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염통이 쫄깃해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소년 시절 그의 선생님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아버지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을 재건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위대한 두뇌를 모셔 온 것이다. 독(獨)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