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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랭이꽃과 카네이션에 얽힌 이야기 [고두현의 아침 시편]

    패랭이꽃(石竹花)                          정습명사람들은 모두 붉은 모란을 좋아해뜰 안 가득 심고 정성껏 가꾸지만누가 잡풀 무성한 초야에예쁜 꽃 있는 줄 알기나 할까.색깔은 달빛 받아 연못에 어리고향기는 바람 따라 숲 언덕 날리는데외진 땅에 있노라니 찾는 귀인 적어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붙이네.*정습명(鄭襲明, ?~1151) : 고려 문신.초야에 묻혀 사는 처지를 패랭이꽃에 비유하면서 세속의 모란과 대비시킨 시입니다. 고려 문신 정습명의 오언율시이지요. 패랭이꽃은 꽃 모양이 옛 민초들의 모자인 패랭이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문학작품에서도 소시민을 비유하는 꽃으로 자주 쓰이지요.이 시에서 패랭이꽃은 시인 자신을 의미합니다. 정몽주의 10대조인 정습명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고 해요.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해서 내시(內侍, 이때까지는 문신이 맡았으나 의종 이후 환관이 차지)에 임명됐습니다. 임금의 잘못 바로잡지 못하고 끝내…그러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이 시 ‘패랭이꽃’을 읊으며 혼자 한숨을 지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예종이 감탄해 그를 옥당(玉堂, 한림원)에 특별히 천거했지요. 그러니 이 시가 그의 출세작인 셈입니다. ‘파한집’에 이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그는 예종에 이어 인종의 총애를 받았고, 의종의 태자 시절 스승까지 맡았지요. <삼국사기> 편찬 감독관으로 김부식, 김효충 등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말년의 인종에게 “의종을 특별히 잘 보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의종을 가르쳤기에 누구보다 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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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작의 바탕은 苦心이 아니라 無心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날이 개다(新晴)이숭인새로 갠 날씨 좋아 초가 정자에 들르니살구꽃 새로 영글고 버들가지 푸르네시가 이뤄지는 건 무심한 곳에 있는데애써 먼지 낀 책에서 영감을 구걸했네.* 이숭인(李崇仁, 1349~1392): 고려 말 문사이숭인의 칠언절구인데, 맑게 갠 봄날 풍광으로 시의 원리를 일깨워주는 시입니다. 여기저기 덧칠하고 꾸며낸 언사가 아니라 비 온 뒤 벙그는 꽃망울과 버들가지 빛깔처럼 맑고 선명한 것이 좋은 시라는 얘기죠.‘뛰어난 시의 바탕은 고심(苦心)이 아니라 무심(無心)’이라는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어릴 때부터 글솜씨가 특출하던 그는 일찌감치 이를 체득한 모양입니다. 그 덕분에 16세에 급제해 21세에 태학(太學) 교수가 되고 이후에도 승진을 거듭했지요. 23세 때에는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 문사(文士)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너무 어리다(25세에 미달) 해서 떠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무심필법(無心筆法)얼마나 뛰어났으면 이색(李穡)이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라고 극찬할 정도였지요. 실제로 명나라 태조가 그의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놀랍다”고 했고, 중국 사대부들도 탄복했답니다.명 태조가 그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1386년(우왕 12년) 정조사(正朝使)로 방문했는데, 최고의 환대와 파격적인 예우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고관들과 펼친 경연에서 그의 재질이 단연 돋보이자 관 위에다 백옥을 얹어 문창성(文昌星)을 표시하고 관복 한 벌, 벼루 한 개를 따로 선물했지요. 그 벼루는 지금도 후손인 성주 이씨 종가에 보관돼 있습니다.그러나 격랑의 시절 탓에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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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봄날 완행버스에서 생긴 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빈자리고두현열네 살 봄읍내 가는 완행버스먼저 오른 어머니가 남들 못 앉게먼지 닦는 시늉하며 빈자리 막고 서서더디 타는 날 향해 바삐 손짓할 때빈자리는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아침저녁 학교에서 못이 박힌 나는못 본 척, 못 들은 척얼굴만 자꾸 화끈거렸는데마흔 고개붐비는 지하철어쩌다 빈자리 날 때마다이젠 여기 앉으세요 어머니없는 먼지 털어가며 몇 번씩 권하지만괜찮다 괜찮다, 아득한 땅속 길천천히 흔들리며 손사래만 연신 치는그 모습 눈에 밟혀 나도 엉거주춤끝내 앉지 못하고.중학교에 갓 들어간 해 봄날, 남해 금산 입구 버스 정류장. 어머니와 함께 읍내 가는 완행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햇살은 따사롭고 풍광은 평화로웠습니다. 금산 보리암에 올랐다 돌아가는 외지인들이 도란거리며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지요.못 본 척, 못 들은 척 … 얼굴만 화끈쪼그리고 앉아 운동화 끈을 다시 매는 사이에 버스가 금방 왔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오르고, 제 앞으로 서너 명이 따라 올랐죠. 다급해진 저는 한쪽 신발을 미처 다 매지도 못한 채 서둘러 뒤를 따랐습니다.한 발을 막 올리려는 순간, 앞사람 옆구리께로 어머니 뒷모습이 보였죠. 중간쯤에 난 빈자리를 몸으로 엇비슷하게 막고 서서 한 손으로 저를 바삐 부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손으로는 멀쩡한 자리에 먼지가 묻었다는 듯 부채질을 하고 있었지요.그 모습이 부끄러워 저는 일부러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습니다. 빈자리는 노약자나 임신부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는지라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지요.그럴수록 어머니의 손짓은 더 바빠졌습니다. 자식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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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백은 왜 '두 번 피는' 꽃일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동백꽃이수복동백꽃은훗시집간 순아 누님이매양 보며 울던 꽃눈 녹은 양지쪽에 피어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홍치마에 지던하늘 비친 눈물도가녈피고 씁쓸하던 누님의 한숨도오늘토록 나는 몰라 …울어야던 누님도 누님을 울리던 동백꽃도나는 몰라오늘토록 나는 몰라 …지금은 하이얀 촉루가 된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빨간 동백꽃.* 이수복(1924~1986) : 전남 함평 출생.1954년 서정주 추천으로 등단. 시집 <봄비> 출간.동백나무는 다산(多産)의 상징이지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서 그렇답니다. 동백은 추위 속에서 망울을 터뜨리는 꽃이어서인지 꽃잎도 두껍습니다. 그 속에 향기 대신 꿀을 잔뜩 머금고 있지요.‘훗시집간 누님’의 홍치마에 지던…추위 속에 피는 동백의 꽃가루는 누가 옮기는 걸까요? 뜻밖에도 벌·나비 등의 곤충이 아니라 텃새입니다. 남부 해안이나 섬에 서식하는 동박새가 그 주인공이죠. 꿀을 유난히 좋아하는 동박새는 귀엽고 앙증맞은 몸으로 동백나무 꽃가루를 이리저리 옮기며 중매쟁이 노릇을 합니다.남부 지방에서는 혼례식 초례상에 송죽 대신 동백나무를 주로 꽂았습니다. 사철 푸른 동백잎처럼 변하지 않고 오래 살며 풍요롭기를 바라는 뜻에서였지요. 시집가고 장가갈 때 아이들이 동백나무 가지에 오색종이를 붙여 흔드는 풍습도 이런 축복의 뜻을 담은 것입니다.이수복 시 ‘동백꽃’에는 축복보다 눈물이 먼저 아롱거립니다. 친정 부모 형제와 정든 집을 떠나 출가하는 것만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그 속에 녹아 있지요. 그 이유는 바로 ‘훗시집’에 있습니다.처녀가 총각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남의 집 후처나 재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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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신혼 치마에 먹물 자국이 아직… [고두현의 아침 시편]

    회근시(回詩)정약용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새 날아갔으나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늙기를 재촉하지만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은혜에 감사하오.이 밤 목란사 노래 소리 더욱 좋고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이 아직 남아 있소.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 모습이니한 쌍의 표주박을 남겨 후손에게 전합시다.* 정약용(1762~1836) : 조선 후기 학자, 시인.다산(茶山) 정약용이 결혼 60주년을 기념해 지은 시입니다. 60회 기념일은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15세에 부인 홍 씨와 결혼한 지 딱 60년이 되는 날이죠. 하지만 회혼 잔치를 베풀려던 그날 아침,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74세의 파란만장한 삶이 잔칫상 사이로 잦아들었지요.이 시는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쓴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애 마지막 작품이군요. 이로부터 2년 후에 부인은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부인의 ‘그 옛날 치마’란 조선 시대 여인들이 입던 하피(霞)를 말하지요.아내 치마폭에 한 자씩 새긴 <하피첩>다산은 유배 생활을 오래했습니다. 전남 강진에서만 17년을 지냈지요. 귀양살이 10년째가 되던 해,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 다섯 폭을 인편으로 보내왔습니다. 젊은 날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남편에 대한 정을 치마에 담아 전하고 싶었을까요.다산은 그런 뜻을 헤아려 치마를 70여 장의 서책 크기로 자르고 다듬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B5 용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지요. 그 치마폭에 종이를 붙여 빳빳하게 만든 다음, 먹을 찍어 한 자 한 자 정성껏 글을 썼습니다.이렇게 해서 완성한 것이 그 유명한 <하피첩(霞帖, 노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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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경주역에서 처음 만난 목월과 지훈 [고두현의 아침 시편]

    완화삼 - 목월에게조지훈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출생. 1939년 <문장(文章)>으로 등단. 시집 <풀잎단장> 등.1942년 봄이었습니다. 2년 전 문예지 <문장>으로 등단한 청년 시인 조지훈이 같은 잡지로 데뷔한 박목월에게 편지를 보냈지요. 얼굴은 모르지만 잡지에 실린 주소를 찾아 문우(文友)의 근황을 묻고 언제 한번 보자고 썼습니다. 며칠 뒤 목월의 답장이 도착했죠.“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한지에 이름 써서 들고 기다린 목월지훈은 그길로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경주 건천역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의 해거름 무렵이었지요. 한가로운 시골역의 플랫폼에 내리자 한지에 자기 이름을 써서 들고 선 목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그때 지훈은 스물둘, 목월은 스물일곱 살이었죠. 두 젊은이는 경주 시내 여관방에서 문학과 삶을 얘기하며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낮에는 목월의 안내로 불국사며 석굴암이며 왕릉 숲길을 거닐었지요.그렇게 열흘 이상 어울리고서야 둘은 헤어졌습니다. 지훈은 고향인 경북 영양의 옛집에 들러 목월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며 목월을 위해 쓴 시 한 편을 동봉했지요. 그 시가 바로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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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0년 전 "내 속에 당신 있고 당신 속에…" [고두현의 아침 시편]

    아농사(我詞) 관도승당신과 나, 너무나 정이 깊어 불같이 뜨거웠지.한 줌 진흙으로 당신 하나 빚고 나 하나 만드네.우리 둘 함께 부수어 물에다 섞어서는다시 당신을 빚고 나를 만드네.내 속에 당신 있고 당신 속에 내가 있네.살아서는 한 이불 덮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네.* 관도승(管道升, 1262~1319): 원나라 때 여성 시인이자 화가.‘파리의 연인’이라는 TV 드라마에 나온 명대사 기억하시나요? 이동건이 김정은의 손을 자기 가슴에 얹게 하고 “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 이 한마디가 장안의 화제였죠. 오늘은 그 대사의 원조 격인 700년 전의 달콤쌉싸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아농사’라는 시를 쓴 관도승(管道升, 1262~1319)은 원나라 때의 여성 화가이자 시인입니다.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묵죽(墨竹)의 명인’으로 유명했죠. 당대 최고 서예가 조맹부(趙孟)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늦게야 결혼했는데 서로 끔찍이 아껴서 금실이 아주 좋았지요. 짧은 시 한 편으로 마음 되돌려그런데 중년에 들어 조맹부에게 여자가 생겼습니다. 지금은 말도 안 되지만, 당시 사대부는 대부분 첩을 얻었기에 대수롭잖게 여겨도 그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뛰어난 인생 도반을 둔 조맹부로서는 차마 아내에게 그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요. 그래서 사(詞)를 한 편 지어 넌지시 건넸습니다.“나는 학사고 당신은 부인이오. 왕(王)학사에게 도엽(桃葉) 도근(桃根)이 있고, 소(蘇)학사에게는 조운(朝雲) 모운(暮雲)이 있다는 소리를 어찌 못 들었겠소? 나는 곧 몇 명의 오희(吳姬) 월녀(越女)를 얻을 것이오. 당신은 이미 나이가 넘었으니 나의 심신을 독점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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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문학상 자양분 된 사랑의 상처 [고두현의 아침 시편]

    하늘의 융단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금빛 은빛 무늬로 수놓은하늘의 융단이,밤과 낮과 어스름의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아일랜드 시인 겸 극작가.아일랜드의 국민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사랑 시입니다. 예이츠가 첫 시집으로 막 이름을 날리던 1889년 어느 봄날, 스물네 살 청년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비밀결사 조직 지도자의 소개장을 갖고 나타난 젊은 여성 모드 곤이었지요.곤은 예이츠의 아버지 앞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싸우자며 열변을 토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예이츠는 곤을 위해 무엇이든 하리라고 다짐했죠. 그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곤이 좋아할 만한 사회활동에 주력하면서 시풍도 탐미적인 것에서 민족주의 성향으로 바꿨습니다.‘독립군 女전사’에게 두 번이나 청혼그런 그에게 곤도 서서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시인에 대한 존경일 뿐 사랑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뛰어난 대중 연설가이자 여성 혁명가인 곤에게 사사로운 연정은 사치에 불과했지요. 그런데도 예이츠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그렇게 10년이 지난 뒤 그는 용기를 내 정식으로 청혼했지요. 곤은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이후 몇 번이나 계속된 구애도 허사였죠. 곤은 결국 아일랜드 독립군 장교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 장교는 1916년 대규모 ‘부활절 봉기’에 참가했다가 영국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