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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 내가 사랑에 빠질 줄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내가 라이오네스로 떠났을 때토머스 하디백 마일 밖 라이오네스로내가 떠났을 때나뭇가지 위에 서리는 내리고별빛이 외로운 나를 비췄지.백 마일 밖 라이오네스로내가 떠났을 때.라이오네스에 내가 머물 때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어떤 예언자도 감히 말 못 하고가장 현명한 마법사도 짐작 못 했지.라이오네스에 내가 머물 때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내가 라이오네스에서 돌아왔을 때눈에 마법을 띠고 돌아왔을 때모두 말 없는 예감으로 눈여겨보았지.나의 드물고 깊이 모를 광채를내가 라이오네스에서 돌아왔을 때눈에 마법을 띠고 돌아왔을 때!* 토머스 하디(1840~1928): 소설 <테스>로 유명한 영국 작가이자 뛰어난 시인, 극작가.토머스 하디가 남긴 연애시입니다. 그는 영국 남부에 있는 도체스터에서 태어났습니다. 철도도 들어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지요. 아버지는 석공이었고, 어머니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어린 시절의 하디는 내성적이고 몸이 약했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약 8년뿐이었죠. 16세 때 건축사무소 수습공으로 들어간 뒤, 건축 업무와 소설·시 쓰기를 병행했습니다.건축기사와 귀족 딸의 은밀한 만남그의 시 중 가장 달콤한 것으로 꼽히는 ‘내가 라이오네스로 떠났을 때’는 서른 살 때의 사랑을 그린 것입니다. 그때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그해 봄 하디는 교회 건물을 수리하기 위해 콘월주에 있는 세인트줄리엇으로 파견됐습니다. 그곳 목사관에 에마 기퍼드라는 처녀가 있었죠. 성격이 활발하고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아가씨였습니다.그녀는 하디의 창작에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둘은 곧 사랑에 빠졌지요. 그녀는 귀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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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관방 벽지에 쓴 인생시 '죽편' [고두현의 아침 시편]

    죽편(竹篇)1 - 여행서정춘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 1941년 전남 순천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등 출간. 박용래문학상, 순천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인생을 대나무와 기차에 비유한 명시입니다. ‘죽편’은 가객 장사익의 노래로도 유명하지요. 서정춘 시인이 1980년대 후반, 허름한 여관방에서 누군가를 종일 기다리다 번개같이 떠오른 시구를 벽지에 휘갈겨 썼다고 합니다.“그날 혼자 여관방에서 ‘인생이란 대체 뭐길래 내가 여기까지 왔나, 왜 왔나,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온갖 상념으로 7시간을 뒤척였죠.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부터, -멀다’라는 시구가 번개같이 떠오르는 거예요. 종이가 없어서 그걸 여관 벽지에다 썼지요….”이 시의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는 끝없는 인생의 여정을 닮았습니다. 시인은 ‘여기서부터,’라고 쉼표를 찍어 반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어 또 호흡을 조절하면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가 얼마나 먼지를 절묘하게 표현했지요. 5행 37자 압축미의 극치입니다.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친 시원래 초고는 25행이 넘었다고 합니다. 여관방도 등장하고 몇 시간이나 사람을 기다리던 얘기도 들어 있고, 이래저래 군더더기가 많았다는군요. 그는 이 시를 4년 동안 80번 이상 고치고 또 고쳤습니다. 그러면서 고향 순천에 많던 대나무와 대나무 막대를 가랑이에 끼고 기차놀이하던 기억, 거기에 대나무의 수직 이미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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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주행거리는 얼마나 될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인생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할머니 둘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편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속도를 늦추자 세상이 넓어졌다”그 속에서 깊은 성찰의 꽃이 피어납니다. 유자효 시인은 평생 시인과 방송기자라는 두 길을 바쁘게 걸어왔습니다. 부산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진해군항제 백일장 등의 장원을 휩쓸고, 대학 시절 가정교사로 바쁜 중에도 스물한 살 때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그 뒤로는 기자가 되어 KBS 파리 특파원과 SBS 정치부장, 보도제작국장, 논설위원실장 등으로 종횡무진했죠.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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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지바고' 영화를 그대로 압축한 시 [고두현의 아침 시편]

    겨울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눈보라가 휘몰아쳤지.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여름날 날벌레 떼가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날아들고 있었네.눈보라는 유리창 위에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 비친 천장에는일그러진 그림자들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운명이 얽혔네.그리고 장화 두 짝바닥에 투둑 떨어지고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희뿌옇게 사라져 갔고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유혹의 불꽃은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십자가 형상으로.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그리고 쉬임없이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촛불이 타고 있었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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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업(生業)이 직업(職業)보다 숭고한 이유 [고두현의 아침 시편]

    생업                                윤효종로6가 횡단보도원단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숨을 고르고 있었다.신호총이 울렸다.장애물을 요리조리 헤치며동대문시장 안 저마다의 결승선을 향해순식간에 사라졌다.좀처럼 등위를 매길 수 없었다.모두 1등이었다.* 윤효: 1956년 충남 논산 출생. 198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 <배꼽> 등 출간. 편운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등 수상.벌써 12월 말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 짧으면서도 강렬한 시 ‘생업’을 소개합니다.생(生)은 윤효 시인의 문학적 화두 중 하나입니다. 생이란 ‘생명’과 ‘목숨’의 비밀을 여는 열쇳말이죠. 나무로 치자면 가장 큰 가지, 풀꽃으로 치면 가장 실한 줄기가 곧 생입니다. 갑골문에서 ‘생(生)’은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날 생(生)이고, 낳을 산(産)입니다. 이 글자는 살 활(活)과 있을 존(存)의 뜻까지 아우르지요.생업(生業)은 목숨 걸고 집중하는 일이 가운데 생업(生業)은 우리가 목숨을 영위하기 위해, 먹고살기 위해 집중하는 일입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는 직업(職業)과 다르죠. 윤효 시인은 분초를 다투며 원단을 실어 나르는 시장통 오토바이 짐꾼들을 보면서 ‘생업’이라는 시를 썼습니다.이 시에는 ‘숨을 고르고’ 잔뜩 긴장해 있다가 ‘땅’ 하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 나가는 달리기 선수들의 속도가 응축돼 있습니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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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인 수녀가 암을 이긴 비결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장 거룩한 것은장재선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명랑 투병으로 희망을 일으킨다는당신,웃는 얼굴이 떠오릅니다.단정한 시를 쓰는 분이그렇게 말이 빠를 줄은 몰랐지요.암을 다스리는 분이그렇게 많이 웃을 줄도 몰랐지요.교도소 담장 안의 이들과편지를 나눈 이야기를 하다가세상 떠난 이들이 사무쳤던당신,끝내 눈시울을 붉혔지요.가장 거룩한 신앙은가장 인간적인 것임을 알려준당신,웃다 울다 하는 모습이예뻤어요.* 장재선: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기울지 않는 길>, <시로 만난 별들> 등 출간. 서정주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 수상.장재선 시인은 문학 담당 기자이기도 합니다. 암 투병으로 고생하던 이해인 수녀를 만나고 나서 ‘가장 거룩한 것은’이라는 시를 썼다고 해요.‘시 쓰는 수도자’ 이해인 수녀에게 암이 발병한 것은 2008년 여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한 것과 달리, 정작 그는 ‘명랑 투병’이라는 신조어를 낳을 만큼 밝고 명랑했지요. 이 시의 첫 구절 ‘겨울 끝에서 봄이 일어나는 것처럼’ 맑은 모습 그대로였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이름이 명숙이에요”‘명랑 투병’이란 표현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해인 수녀가 문화부 기자인 장재선 시인에게 들려준 얘기는 이렇습니다.“명랑 투병? 하하. 제 주민등록상 이름이 명숙이에요. 밝을 명, 맑을 숙. 암센터에서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수술 먼저 하겠느냐, 방사선 치료 먼저 하겠느냐고 묻더군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즉시 표정을 밝게 하고 답했지요. 60여 년 살았으니까 됐어요. 선생님 좋은 대로 하셔요. 이후의 결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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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집착에서 벗어난 비결은? [고두현의 아침 시편]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이색이미 지나간 아주 작은 일들도꿈속에선 선명하게 생각이 나네.건망증 고쳐 준 사람 창 들고 쫓아냈다는그 말도 참으로 일리가 있네.아내를 놔두고 이사했다는 것 또한우연히 한 말은 아닐 것이라 싶네.몇 년간 병든 채로 지내온 지금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이색(李穡, 1328~1396): 고려 시인, 대학자오늘은 고려 말기 시인이자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를 읽습니다.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삼은(高麗三隱)으로 추앙받은 인물이지요. 14세 때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해 양국 관리를 겸할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건망증 고쳐준 사람을 쫓아내다니그런 그도 여말선초 격변의 역사 속에서 몇 차례나 유배와 추방을 당했습니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살해되는 고통까지 겪었지요. 역성혁명에 협력하지 않아 한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등이 겨눈 칼날 앞에 서야 했습니다.새 정권의 권유를 뿌리치고 낙향했지만, 아들들의 죽음 때문에 결국에는 깊은 병을 얻었죠. 시골집에 은거한 지 2년 만에 부인이 죽고, 그로부터 2년 뒤엔 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그가 남긴 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기심을 내려놓다(息機)’의 행간은 더없이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마지막 구절 “기심(機心)을 내려놓는 것이 약보다 낫네”에 주제가 함축돼 있지요.기심이란 무엇일까요?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마음, 책략을 꾸미는 마음을 말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좋으니 싫으니 따지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신을 쉬게 해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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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과 동주는 왜 당나귀를 좋아했을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을 거두어들이는 일. * 프랑시스 잠(1868~1938) : 프랑스 시인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에서 평생 사랑과 생명을 노래한 전원시인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 그는 절친한 벗 앙드레 지드와 함께한 알제리 여행, 잠깐 동안의 파리 생활을 제외하고는 외딴 산골 마을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포용과 모성의 시인이자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 요소를 씻어낸 자연주의 대가로 꼽힙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에 나오는 정서 그대로였지요. 그의 작품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겸손과 온화로 이끌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고답적이고 난해한 시에 넌더리를 내던 독자에게는 청순한 샘물과 같았죠. 이른바 ‘잠주의(Jammisme)’라는 문학운동까지 생겼습니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난해하고 기교적인 시와 달리 간명하고도 쉬운 시로 독자를 사로잡은 결과였지요. 우아와 은총의 삶…별명은 ‘당나귀 시인’그는 ‘전깃줄 위에 앉은 제비들의 슬프고 불안한 모습’처럼 위태로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