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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절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등 펴냄. 김만중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 수상.오늘은 공광규의 시 ‘소주병’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한때 누군가의 아들이었지요. 그 아들이 커서 아버지가 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우리들의 아버지. 아버지의 말수는 적지만 가슴속 웅덩이는 갈수록 깊어가고…. 그래서 아버지의 술잔엔 ‘눈물’이 절반이라고 했을까요. 이 시는 공광규 시인이 대천해수욕장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착상했다고 합니다. 빈 소주병을 입에 대고 불면 ‘붕붕’ 하고 우는 소리가 나죠. 이걸 아버지의 울음소리와 연결했는데, 찬찬히 읽다 보면 명치끝이 아릿해집니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기만 하다가 끝내 버려지는 소주병과 아버지의 고단한 일생이 동시에 겹치지요. 아버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가족을 위해 온갖 고초를 견디며, 자식들 잘 키우려고 힘에 부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늙어 쇠잔해지면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 빈 소주병” 신세가 되곤 하지요. 사회적 지위나 빈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한평생은 이처럼 결핍을 메우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삶일 것입니다. 시인의 아버지도 다른 아버지들처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했지요. 평생 도시와 광산으로 떠돌다 농촌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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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귀가 나를 가르쳤다"…마음을 얻는 법 [고두현의 아침 시편]

    이런저런 생각 두순학 큰 바다 파도는 얕고 사람 한 치 마음은 깊네 바다는 마르면 바닥을 드러내지만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 알 수가 없네 * 두순학(杜荀鶴, 846~907) : 당나라 시인 당나라 시인 두순학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마흔여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진사가 되었지요. 아마도 그의 깊은 속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큰 바다 파도’와 ‘한 치 사람 마음’을 대비시킨 이 시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우리 속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 속은 참 알 수가 없지요. 너무나 변화무쌍해서 첨단 과학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여론조사나 소비자 분석 적중률이 90%에 이른다지만, 10%의 오차 때문에 뜻밖의 결과가 나오곤 하지요. 기업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때 확신을 갖고 기대했다가 시장의 차가운 반응에 당혹해 하는 일도 많습니다. 칵테일 파티 효과와 마음의 비밀아주 시끄러운 술자리에서 누군가 자기 이름을 입에 올리면 금방 알아챕니다. 혼잡한 거리를 걷다가도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즉각 고개를 돌립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려야 할 곳의 안내 방송이 나오면 잠에서 번쩍 깨기도 하죠. 심리학자들은 이런 일을 ‘칵테일 파티 효과’로 설명합니다. 칵테일 파티 효과란 왁자지껄한 파티장 소음처럼 수많은 잡음 속에서도 관심 있는 소리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것이 ‘확증 편향’과 겹치면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리한 정보만 모으는 게 확증 편향이잖아요. 주식을 산 사람은 값이 오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상승 요

  • 병산서원 배롱꽃 아래에서 당신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서안나 : 1965년 제주 출생. 1990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등 출간.이 시에는 많은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시인의 경험과 그 속에 깃든 사연이 종횡으로 엮여 있지요. 어느 해 여름, 동료 시인들과 문학 순례를 떠난 시인은 안동 하회마을 인근의 병산서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산서원에는 붉은 목백일홍(배롱나무)꽃이 만발해 있었죠.100일 가는 꽃 … 백일홍 → 배기롱 → 배롱목백일홍은 꽃을 한번 피우면 100일 이상 간다고 해서 ‘백일홍(百日紅)나무’라고 부릅니다.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서 ‘배기롱나무’로 불리다 ‘배롱나무’가 됐죠. 이 나무는 붉은 꽃을 석 달 반 넘게 피워 올립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과 다르지요. 그 비결은 한 송이가 오래 피는 게 아니라 여러 꽃망울이 이어 가며 새로 피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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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격(品格)'에 입 구(口) 자가 4개인 까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대나무를 그리면서 정섭 한 마디 다시 한 마디 천 가지에 만 개의 잎 내가 대나무를 그리면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벌과 나비 수선 떠는 것 면하기 위해서라네. *정섭(鄭燮, 1693~1765): 청나라 서화가이자 문인. 묵죽(墨竹)의 대가인 정섭은 시서화(詩書畵)에 정통했습니다. 독보적 화풍에 뛰어난 시문을 자랑했지요. 그는 대나무를 아주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대나무 천 가지에 만 개의 잎을 그리면서 벌·나비가 몰려들어 수선 떠는 것을 피하려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품격(品格)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판교(板橋)라는 호를 즐겨 써서 정판교로도 잘 알려져 있지요.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늦게야 과거에 급제했고, 44세에 처음으로 지방 관리가 됐습니다. 10여 년의 관직 생활 중 그는 자기 이름보다 백성들의 배고픔을 헤아리는 데 더 힘썼습니다. 어느 해 큰 재해가 들었는데, 모두가 기아에 허덕이다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까지 파는 참상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는 관청의 창고를 열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줬습니다. 아전이 “관청 창고를 마음대로 열면 관리로서 죄명을 얻는다”며 만류해도 “상부에 일일이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다면 그동안 백성이 얼마나 굶어 죽을지 모른다. 죄가 주어진다면 나 혼자 받겠다”며 쌀을 풀어 1만여 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결국 사달이 났지요. 권력가에게 미움을 산 그는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난득호도(難得糊塗)’입니다. 총명하기도 멍청하기도 어렵지만, 총명함에서 멍청함으로 바뀌기란 더욱 어렵다는 뜻이지요. 그의 품격을 짐작하게 하는 명언입니다.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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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난한 사랑 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1956년 ‘문학예술’로 등단. 시집 등 출간.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 수상. 언제 읽어도 콧등이 찡해지는 시입니다. 언젠가 신경림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서울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에 살 때였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자주 들르던 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 집 딸과 연인 사이인 한 청년을 만났다는군요. 그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는 열정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처지를 못내 부끄러워하는 순박한 젊은이였죠. 청년이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 집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결혼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딸 가진 부모로서는 그런 사위를 맞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청년은 그 집 딸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여러 번이나 했다고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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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뿔싸움'과 긍정의 힘 [고두현의 아침 시편]

    술을 앞에 놓고(對酒·二)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하듯 찰나에 사는 몸 풍족하나 부족하나 그대로 즐겁거늘 하하 크게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 백거이(白居易, 772~846) : 당나라 시인. 어려서부터 총명해 5세부터 시를 썼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생전에 즐겨 암송한 시입니다. 정 회장은 걱정으로 마음이 졸아들 때 이 시를 읊으며 용기를 냈습니다. 눈앞의 작은 분쟁을 경계하고 호방하게 큰일을 도모하는 지침으로 삼기도 했지요.한 몸에 난 촉수끼리 싸우다니…달팽이는 머리 위에 두 개의 촉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몸에 난 촉수끼리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될까요. 불필요한 분쟁을 의미하는 고사성어 ‘와각지쟁(蝸角之爭)’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달팽이(蝸) 뿔(角) 위에서 싸우는 것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 다툼을 뜻하지요. 에 이와 관련한 얘기가 나옵니다.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혜왕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제나라 위왕이 약속을 깨자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신하인 공손연은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치자고 했고, 또 다른 신하 계자는 백성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라며 반대했습니다. 이에 혜왕이 재상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재상은 도가의 현인인 대진인(戴晉人)을 만나보라고 했죠. 혜왕을 알현한 대진인은 달팽이 우화를 들려줍니다. “달팽이의 왼쪽 촉수에는 촉(觸)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에는 만(蠻)씨라는 사람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가 사소한 영토분쟁으로 전쟁을 일으켜 서로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비극에 이르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혜왕이 엉터리 이야기라고 말하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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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지 않고 이기는 목계(木鷄)의 비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춘주(春晝) 한용운 따슨 빛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볍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린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요. * 한용운(韓龍雲·1879~1944)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마음을 다스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만해 한용운은 꽃과 글자로 그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따뜻한 봄날의 여운을 만끽하며 책을 읽는 중에 꽃잎이 날아와 글자를 가리지만 굳이 꽃잎을 치우지 않는 마음! 그 여백과 직관의 순간에 유마경의 깨달음이 완성되지요. 이 시가 말하는 것처럼 진리는 간명합니다. 여백의 사고와 직관의 힘은 그것을 부릴 줄 아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가져다줍니다. 창의적인 사고도 여백의 지혜에서 나오지요. 부드러운 카리스마 또한 그렇습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응접실에 목계(木鷄·나무로 깎아 만든 닭) 그림을 걸어 놓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목계는 의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투계(鬪鷄·닭싸움)를 좋아하는 왕이 어느 날 기성자라는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열흘 후 왕이 물었지요. “닭이 이제 싸울 수 있겠는가?” 기성자가 아뢰었습니다. “아직 안 됩니다. 강하긴 하지만 교만합니다. 허세를 부리면서 제힘만 믿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 물었습니다. “안 됩니다. 교만함은 줄었지만 너무 조급해서 진중함이 없습니다. 다른 닭을 보거나 울음소리만 들어도 당장 덤벼들 것처럼 합니다.” 열흘이 지나 재차 물었습니다. “아직도 안 됩니다.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최고의 투계는 아닙니다.” 또 열흘이 지나 40일째 되는 날 왕이 묻자 기성자는 “이제 된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닭이 소리를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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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한 시간'과 행복의 나이테

    나이 이븐 하즘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와 이마에 팬 내 주름살을 보고는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그럴 때 난 이렇게 대답하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고 그 모든 걸 다 합친다 해도 말이야. 아니 뭐라고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또 이렇게 되묻는다네. 그런 셈법을 진짜로 믿으라고요? 그러면 나는 얘기하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내 품에 살짝 안겨 은밀하게 입을 맞춘 그 순간,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 짧은 시간만을 나이로 센다고. 정말 그 황홀한 순간이 내 모든 삶이니까. * 이븐 하즘(994~1064) : 중세 스페인 시인이자 역사가·법학자 누구에게나 있지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처럼 ‘짧지만 영원한’ 순간의 아름다움! 시인 이븐 하즘은 바로 그 ‘순간’들이 모여 세월의 지층을 이루고, 그 단면에 새겨진 행복의 나이테가 곧 ‘내 삶의 전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국에서 이런 질문으로 현상 공모를 한 적이 있는데, 1등은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집안일을 마치고 휘파람을 불며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 작품 완성을 눈앞에 두고 붓에 물감을 묻히는 화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땀을 닦는 외과 의사가 꼽혔습니다.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모래성을 쌓는 아이의 표정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쉬는 날 한가롭게 집 안 정리를 끝내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은 또 어떤가요. 콧노래나 휘파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 그림을 그리면서 마지막 ‘화룡점정’의 순간을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