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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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냄새 나는 사람 이월춘

경화오일장을 거닐었지
삶은 돼지머리 냄새처럼
가격표가 없는 월남치마가 바람에 펄럭이고
내동댕이치는 동태 궤짝을 피해
장돌뱅이들의 호객 소리에 귀를 내주면서

나이 들고 넉살이 늘어도
국산 콩 수제 두부는 어떻게 사야 하며
맏물 봄나물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 없이는 세상을 살 수 없는 재래시장

갓 구운 수수부꾸미를 맛보며
고들빼기김치나 부드러운 고사리나물을 담고
과일 노점 옆 참기름집에서 이웃을 만나고
오는 사람마다 결을 맞춰주는 마법의 시장

경화오일장을 바람처럼 거닐었지
나만의 광야, 즐거운 소란 속으로
나만의 고독을 끌고 들어가 아픔을 벗고
마침내 어둠의 갈피 속에서 길을 찾아냈지

‘바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냄새’가 배어 있을까요. 세 단어 모두 입술이 마주 붙는 ‘미음(ㅁ)’을 보듬고 있듯이, 서로의 몸에서는 닮은 냄새가 납니다.

이 시는 이월춘 시인이 최근에 펴낸 시집의 표제작입니다. 시인은 어느 날 진해의 경화오일장을 거닐다가 “가격표가 없는 월남치마가 바람에 펄럭이”는 장면을 눈여겨봅니다. 한쪽 귀로는 “장돌뱅이들의 호객 소리”를 듣고, 혀로는 “갓 구운 수수부꾸미”를 맛봅니다. 경화오일장을 바람처럼 거닌 시인그 틈틈이 “국산 콩 수제 두부는 어떻게 사야 하며/ 맏물 봄나물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으며 “과일 노점 옆 참기름집에서 이웃을 만나고/ 오는 사람마다 결을 맞춰주는 마법의 시장”과 한 몸이 됩니다.

그렇게 “나만의 광야, 즐거운 소란 속으로/ 나만의 고독을 끌고 들어가 아픔을 벗고/ 마침내 어둠의 갈피 속에서 길을 찾아”내는데,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응한 감각 요소가 “삶은 돼지머리 냄새”라는 후각입니다.

이 ‘냄새’는 ‘바람’과 ‘사람’을 잇는 삶의 눅진한 현장으로 독자를 인도하면서 ‘어둠 속의 길 찾기’라는 방식으로 우리와 동행합니다. 그런 점에서 표제시 ‘바람 냄새 나는 사람’을 ‘사람 냄새 나는 바람’으로 바꿔 읽어도 또 다른 흥미와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경화오일장을 ‘바람처럼’ 거닐었을까요.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이달균 시인에 따르면, 진해는 그를 성장시키고 현재까지 이끌어준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 20대에 동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6년 시집 <칠판지우개를 들고>를 펴냈으며, 현재 아홉 번째 시집 <바람 냄새 나는 사람>까지 훠이훠이 걸어왔는데 그 세월이 ‘바람’과 같습니다.

이곳은 “시인이 꿈꾸고 펼친 광야”이며 때론 “고독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헤맨 우주”였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러고 보니 이월춘 시인은 1983년 이곳 진해남중학교에 국어 교사로 첫 부임, 진해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진해남중학교 교감, 교장으로 재직하며 평생 교단을 지켰으니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모두 이 도시의 ‘바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졌군요. 정년퇴직 후에도 진해에 있는 경남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알다시피 진해는 해마다 벚꽃 도시로 변합니다. 꽃이 만개하는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벚꽃축제가 펼쳐지지요. 진해 도심을 가득 채운 36만 그루의 왕벚나무가 꽃을 피우면 경화역 등 벚꽃 명소마다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꽃잎 뒤의 아픈 그림자그러나 시인은 화려한 벚꽃 광장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꽃잎 뒤의 아픈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찬찬히 살피는 것이 곧 시인의 눈이지요. 그런 삶의 자세 중 하나가 이번 시집 속 ‘벚꽃 피면 울고 싶다’라는 시에도 투영돼 있습니다.

화단의 꽝꽝나무 가지가 꿈틀거리더니
산모롱이 돌아 그예 벚꽃 피는 기척
그대의 마음이 오는 것 같네

숱한 서리와 얼음의 시간을 건너왔으니
강렬한 밤 벚꽃과 꽃잎 뒤의 아픈 그림자
사람답게 사는 길을 묻고 있네

힘들어도 묵묵히 견디는 나무의 여유
삶의 여백을 채운 소중한 시간 앞에
더 이상 두려워서 꽃을 찍지 마시라

꽃이나 보자고 이 봄날 일부러 왔나
머잖아 모란 영글고 작약 피면
속울음 몇 줌 밀봉해서 부쳐야지

시인은 이렇듯 바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의 안쪽, 내면의 감응을 길어 올리면서 우리 삶의 어두운 심연을 밝힙니다. 아울러 해가 뜨기 전의 푸르스름한 여명을 비춥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마음속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새벽길을 함께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 길에서 “화단의 꽝꽝나무 가지가 꿈틀거리”는 몸짓이나 “산모롱이 돌아 그예 벚꽃 피는 기척”, “그대의 마음이 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가끔은 “강렬한 밤 벚꽃” 내음과 함께 “꽃잎 뒤의 아픈 그림자”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묻고 있”는 장면도 만날 수 있습니다. √ 음미해보세요
시인
시인
진해는 이월춘 시인을 성장시키고 현재까지 이끌어준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서 20대에 동인 활동을 시작했고, 1986년 시집 <칠판지우개를 들고>를 펴냈으며, 현재 아홉 번째 시집 <바람 냄새 나는 사람>까지 훠이훠이 걸어왔는데 그 세월이 ‘바람’과 같습니다. 이곳은 “시인이 꿈꾸고 펼친 광야”이며 때론 “고독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헤맨 우주”였기 때문이기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