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의 섬
김구슬
그림자 섬 영도(影島),
분홍 대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작은 풀꽃 가득한 정원에 스민 차가운
물기는
진한 핑크빛 독일 장미의
관능을 씻어내고,
벽에 걸린 톨스토이의 노자적 표정은
초록 풀들의 속삭임을 금한다.
차가움과 뜨거움,
움직임과 정지의 교란 사이에
황홀한
푸른 식탁이 펼쳐진다.
진지한 런치 후의
담백한 티 타임,
'천 권 시집의 집'
카페 '영도일보'는
극지와 열대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구현한
‘그림자의 섬’이다.
이 시에 나오는 영도(影島)는 특이하게 ‘그림자 영(影)’ 자를 이름에 씁니다. 왜 그럴까요?
부산 앞바다 섬 영도는 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 국가가 경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자란 말이 워낙 빨라 그림자(影)가 끊어져(絶)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이 시의 ‘그림자’ 모티브와 연결됩니다. 그림자는 실체와 함께 있지만 실체와 다른 차원의 존재이지요. 영도라는 섬의 존재도 그렇습니다. 영도는 지도 위의 한 섬일 뿐만 아니라 땅과 바다, 과거와 현재, 전쟁과 피란, 생과 사를 잇는 역사적 기억의 교차로입니다.
시집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 ‘영도’
김구슬 시인의 ‘그림자의 섬’은 최근 나온 시집의 표제작인데, 시집 속에 영도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묘박지’라는 시에도 “어린 시절 듣던 영도다리의 사연들이/ 이제 대교 저 높이 걸려 있다”, “배들은,/ 부두도 아니고 뱃길도 아닌 곳에서/ 부동도 움직임도 아닌 상태로/ 닻을 내리고 호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구절이 아주 성찰적입니다. “우리도, 죽음과 탄생 사이에서/ 부름을 기다리며/ 외롭게 서성이고 있다.// ‘영도다리 아래서 만나자’던/ 피난민들의 애잔한 삶이 서린/ 만남의 거점,// 그 역사처럼/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무심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제 영도는 대한민국에서 인구밀도가 제일 높은 섬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유명 카페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카페 ‘영도일보’도 그중 한 곳입니다.
시 ‘그림자의 섬’은 카페에 들어서는 방문객의 시선을 따라 “분홍 대문”과 “풀꽃 정원”, “핑크 장미” 같은 감각적 색채를 보여주면서 이 이미지를 차가움과 뜨거움, 움직임과 정지, 극지와 열대라는 상반된 속성의 ‘교란’과 ‘조화’의 이중 장치로 엮어냅니다. 이 상반성을 대립이 아닌 긴장과 균형의 힘으로 전환하며, 시 속의 공간을 “황홀한 푸른 식탁”으로 펼쳐 보입니다. 그 순간 한 점의 섬이 커다란 세계로 증폭되는 경계의 전환이 이뤄집니다.
그러고 보니 김구슬 시인의 고향도 바닷가입니다. 지금은 창원시로 편입된 경남 진해이지요. 그의 아버지는 시인이자 한학자인 월하 김달진(金達鎭, 1907~1989)입니다. 김달진 시인은 22세에 <문예공론>으로 등단한 이후 한국 시의 정신주의적 세계를 확립했습니다. 후학들은 그를 기려 김달진문학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진해에 있는 생가에서 김달진문학제와 함께 시상식을 엽니다.
저도 2024년 김달진문학상을 받으면서 문학제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때 수상소감에서 김달진 시인의 ‘샘물’을 이야기한 기억이 납니다.
“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았다.”
작은 샘물이 하늘과 바다로 무한히 넓어지는 풍경과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아 보는 시인의 모습을 이토록 담박하게 그릴 수 있다니! 숲속 샘물을 둥근 지구와 우주의 섬으로 치환하는 감각이 놀랍고도 경쾌했습니다. 티끌과 우주, 찰나와 영겁의 합일이라고 할까요.
영도와 그림자, 분홍 대문과 풀꽃 정원, 푸른 식탁 사이에서 “진지한 런치 후의/ 담백한 티 타임”을 즐기면서 “극지와 열대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구현한/ ‘그림자의 섬’”을 완성하는 과정도 그 경계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시 속의 영도는 지리적 물리적 공간이면서 시인의 내면 풍경과 세계의 현주소를 비추는 축약판입니다.√ 음미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