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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프랑스로 떠난 순간, 이사벨 여왕이 그를 불러들였다

    어느 시대나 벤처는 고달프다. 돈을 몇 배로 불려주겠다는데도 투자자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처음 하는 일이라 제안자의 주장은 검증이 불가능하고 투자자는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동안 혀가 닳고 구두축이 닳는다. 그리고 결국은 인생 자체가 닳아 무의미하게 사라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라고 하면 우리는 달걀을 깨서 세웠다는 에피소드 정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적당한 고생 끝에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투자자를 찾아다닌 여정은 좌절과 절망의 파노라마였고, 대서양 항해는 목숨을 건 기만이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한 기적이었다.표류지에서 인생의 방향을 찾다1451년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스물다섯에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가 탄 배가 해적선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콜럼버스는 상처를 입은 채 무려 5해리(거의 10㎞)를 헤엄쳐 포르투갈의 라고스 인근 해안에 도착한다. 라고스는 바로 엔히크 왕자가 대서양 탐사를 위해 항구와 조선소를 지은 곳이다. 바다에 관심이 많은 콜럼버스에게 이 표류는 주체할 수 없는 영감을 준다. 그는 제노바로 돌아가는 대신 리스본항에서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웠고, 틈만 나면 배를 타고 주변 항구를 돌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원양 어선 캐러벨 조종법을 익힌 것도 이 시기로, 1477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지나 북극권 한계까지 항해했으니 북쪽으로는 거의 끝까지 간 셈이다.리스본에서 콜럼버스는 인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아내인 펠리파의 아버지는 엔히크 왕자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한 선장이자 관리였고, 할아버지는 아예 왕자를 직접 섬긴 기사였다. 바닷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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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앙 2세, 희망봉 통과해 인도양 진입로 열었다

    “0에서 1까지의 거리는 2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탈무드>에 나오는 격언인데 보통은 시작이 중요하니 일단 뭐가 됐든 하고 보라는 은유로 해석된다. 진화생물학자 린 마굴리스(1938~2011)는 수백 년 내려온 이 설명을 뒤집었다. “무생물과 박테리아 사이의 간극은 박테리아와 사람 사이의 간극보다 더 크다.” 경구가 은유가 아니라 직유라는 얘기다. 실제로 무생물에서 생물을 탄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화학적 과정을 거치기에는 지구의 역사가 너무 짧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굴리스의 말은 창조론자들을 고무시켰다. 과학자의 이론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녀의 연구는 과학의 영역에도 도움을 주었다. 스웨덴 화학자 아레니우스(1859~1927)는 우주에는 별빛의 압력에 의해 공간을 떠다니는 살아 있는 포자들이 충만하다는 가설을 제기했는데 - 그래서 이게 지구에 떨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 이 주장이 탄력을 받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낙사고라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범종설(panspermia)을 둘러싼 시비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실력도 안 되는 과학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바스쿠 다가마, 마젤란을 배출한 최고의 해양 학교마굴리스 여사의 말은 역사에도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하다는 얘기다. 물론 이때 ‘거리’는 ‘크기’로, 동사는 ‘길다’ 대신 ‘크다’로 바꿔 써야 어울리겠다. 시작,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1’이라는 구체적 성과가 있기 전까지 시작의 의미나 가치는 없다. ‘1’이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거대한 것을 추진했든 결국 0인 것이며 1을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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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 해양연구소 세운 포르투칼 엔히크 왕자

     세계경제 중심을 유럽으로 옮긴 두 개의 사건총생산만 놓고 보면 19세기 초까지도 세계의 무게중심은 아시아였다. 정확히는 중국과 인도인데, 19세기 초반 기준 두 나라의 총생산을 합치면 3400억 달러로 전 세계 총생산의 거의 50%를 차지했다. 이게 역전된 시기가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유럽과 미국이 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 19세기 이전까지 중국과 인도는 내내 풍요로웠고, 유럽과 미국은 줄기차게 프롤레타리아트 지역이었을까. 총생산에서 유의할 부분이 인구다. 시대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고, 19세기 초반에는 무려 37%를 기록했다. 이러니 총생산 액수가 높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인도까지 가세하니 총생산 절반이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 가난해도 개인 윤택하던 유럽, 반대인 중국그러나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치를 보자. 서기 1000년 서유럽 1인당 GDP 평균은 400달러였다. 중국은 450달러로 아직까지는 중국 우세다. 그러나 1500년이 되면 이 숫자가 서유럽은 771달러로 증가하는 반면 중국은 600달러에 그쳤다. 국가별 총생산액이 아니라 개인의 윤택에서 서유럽은 이미 중국을 따라잡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후의 추세다. 19세기 초반 중국이 여전히 600달러를 고집하는 동안 서유럽은 1200달러를 돌파하며 두 배 차이로 중국을 따돌렸다. 이유는 당연히 산업혁명이다. 생산성 측면에서 유럽이 거침없이 질주하는 동안 농업 중심인 중국 경제는 장기 침체를 겪고 있었다. 그렇다면 1500년의 동서 역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대항해시대 개막이다. 중국이 바다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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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변두리 포르투갈 '대항해 개막전' 첫 투수로

    18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객관적 지표는 보잘것없었다. 유럽 국가 중 영토는 10번째, 인구수로는 13번째의 중위권 국가였고, 영토까지 산재돼 있어 언제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허술한 나라가 중부 유럽의 두 강자인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잇달아 격파하고 통일 제국을 이룬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오스트리아와 벌인 7년 전쟁의 승리는 순전히 운이었다. 프로이센이 백기를 들기 직전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파트너이던 러시아 황제 자리에 친(親)프로이센 인물이 등극한다. 표트르 황제는 다 이긴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평화 협상을 벌였고 전쟁 중 러시아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한다는(?) 해괴한 조건으로 철군한다. 심지어 동맹국인 스웨덴까지 설득해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는데, 덕분에 오스트리아 혼자 달랑 남은 이 행운을 ‘브란덴부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른다.1870년 프랑스와 벌인 전쟁은 초등학생이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시비를 건 것과 같은 무모한 도발이었다. 사람 머릿수가 국력이던 시대에 인구가 7배나 더 많은 국가를 상대로 한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당시 프로이센은 영국의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국이 천사라서 그런 게 아니다. 아메리카와 아시아를 놓고 프랑스와 패권을 다투던 영국으로서는 프랑스 군인을 단 한 명이라도 유럽에 더 묶어두어야 했기에 프로이센을 대륙의 검(劍)으로 활용한 것이다. 후에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는 아메리카 정복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독일에서 이루어졌다고 촌평했다. 모호할 때, 이해가 안 갈 때 큰 그림을 보면 답이 나온다.포르투갈, 지중해의 변두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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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슬림이 동쪽 막자 서쪽으로 눈길 돌린 콜럼버스

    전 세계에서 유대인에 호의적인 나라는 한국과 미국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도 이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미국인의 절반이 등을 돌렸지만(대체로 젊은 세대와 민주당 지지자) 우리는 아직도 유대인의 든든한 심정적 후원자다.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집회에서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가 휘날리는가 하면 서점에서는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 <부모라면 유대인처럼> 같은 책들이 인기리에 팔린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서 다른 하나는 그와 내가 닮아서. 실제로 한국인과 유대인은 닮은 구석이 많다. 똘똘 뭉치는 강렬한 민족의식, 열정적인 자녀 교육열, 넘치는 근면성(특히 이민 사회에서 보이는) 그리고 풍부한 영적 성향 등이 그렇다. 반면 유대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호를 별로 따라가지 못한다. 유대인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탈무드다. 집집마다 탈무드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한 권 정도는 있으며, 교육이나 글쓰기에서 많이 활용된다. A 인터넷 서점에서 탈무드를 검색하면 무려 1141건이 뜬다. 그런데 탈무드는 과연 한 권으로 이루어진 책일까. “집에 안 보는 탈무드 있으면 좀…”유대인의 율법은 성문(成文)과 구전(口傳) 둘이다. 구약성경의 모세 5경이 성문 율법으로 대략 300페이지짜리 단행본 한 권 분량이다. 보통 ‘토라’라고 한다. 유대인은 모세가 말로 전한 가르침을 입에서 입으로 옮기며 신앙의 바탕으로 삼았는데 그게 ‘미쉬나’와 ‘게마라’다. 이 둘을 합친 게 탈무드로 분량이 300페이지짜리 단행본 40권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거나 가지고 있는 탈무드는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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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 올라가 알라·예수 만났다"는 무함마드 승천설

    200년 만에 3개 대륙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 이슬람인생에서 행운은 보통 하나씩 온다. 반대로 불행은 하나만 달랑 오는 경우가 드물다. 보통 둘 셋이 겹치는데, 대부분의 인생은 이 대목에서 무너지거나 망가진다. 무함마드에게도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그가 마흔아홉 살 무렵인 619년 아내인 카디자와 숙부인 아부 탈립이 연달아 사망한 것이다. 아내가 경제적·심리적으로 무함마드를 받쳐주었다면 숙부는 정치적 바람막이였다. 그가 주창하던 유일신 사상과 알라 앞의 평등은 이제 칼이 되어 무함마드에게 돌아온다. 무함마드는 살기 위해 메카를 탈출하지만 메카 귀족들이 자비롭게 이를 보내줄 리가 없다. 추격대가 따라붙었고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알라의 자비로운 손길은 여러 번 무함마드를 감싼다. 동굴에 숨었더니 거미가 와서 그 앞에 거미줄을 친다든지 하는 식인데, 상금에 환장한 칼잡이들이 단지 그 이유로 동굴을 지나쳤다는 건 좀 믿기 어렵다. 하여간 그는 탈출에 성공했고 메디나에 안착한다. 율리우스력으로 대략 622년 7월 2일인데 ‘헤즈라’라고 불리는 이날은 이슬람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한 날이자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이슬람력은 우리나라로 치면 지금은 잘 안 쓰는 단기(檀紀)인데 한민족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을 단군의 고조선 건국 기준으로 한다. 기원전 2333년이 단기 1년으로 2024년은 단기 4357년)기독교인들의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로얼마 안 가 무함마드 세력과 메디나 원주민인 유대인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처음 유대인은 무함마드를 자신들과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으로 알았다. 똑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예배를 드렸고 교리도 엇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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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신 주장' 무함마드, 메카 귀족들의 '공공의 적'

     300년 전쟁과 메카의 성장모든 제국에는 숙적(宿敵)이 있다. 굳이 한자로 쓴 이유는 숙(宿) 자가 숙명(宿命)에도 쓰이고 숙변(宿便)에도 쓰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적인 동시에 오래 묵은 적이다. 딱히 대등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만하지도 않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다. 전성기 로마의 숙적은 파르티아였다. 로마 시민 절반을 채무자로 두었을 만큼 돈은 많았지만 군사적 업적은 초라하던 로마 삼두정치의 한 축인 크라수스가 공명심에 침공을 감행했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은 것도 파르티아와 벌이던 전쟁에서다. 로마에게 수도를 세 번이나 점령당하면서도 버티던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것은 사산(Sassanid)왕조(사산조페르시아)다. 그리고 사산왕조는 동로마제국의 파르티아였다. 중간에 아르메니아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던 로마 vs 파르티아와는 달리 동로마와 사산왕조는 거의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당연히 둘은 내내 싸웠고 사산왕조 427년 동안 서로 바빠 전쟁을 못했던 379년에서 498년까지 120년을 뺀 300년이 거의 전쟁 상태였다. 이를 보통 ‘300년 전쟁’이라 부른다. 닫힌 실크로드, 새로운 무역 경로를 찾아서조금 큰 규모의 오아시스 도시이던 메카가 급성장한 이유도 300년 전쟁 때문이다. 중국 시안에서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카스피해 남쪽을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실크로드가 막힌 것이다. 고대와 중세 무역은 한두 배 남는 장사가 아니다. 길이 없다고 수십 배, 어떨 때는 수백 배 남는 장사를 포기할 상인은 없다. 이들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하나는 바닷길인데 아라비아반도를 끼고 홍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또 한 무리는 실크로드 아래 아라비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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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일본·이슬람 역사 잘 모르는 까닭은

    한국인들이 비정상적으로 무지한 종목이 두 개 있다. 일본 역사와 이슬람 문명이다. 몇 해 전 오사카에 벚꽃 구경을 갔을 때다. 오사카성을 둘러보던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여기는 누가 살던 곳인가요?”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알겠느냐는 듯 누군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마 지체 높은 귀족이 살았겠지요.” 잠시 망설였다. 타인의 무지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성의 주인이 누구고 임진왜란 이후 패권 쟁탈전 때 포격으로 완파되었다가 누가 재건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면 면전에서야 “와, 대단하다” 하겠지만 속으로는 “재수 없는 놈, 잘난 척은” 하며 분위기가 냉랭해질 것이다. 원칙을 지킨 덕에 투어는 내내 평온했다.그분들은 평생 산간벽지에서 농사를 지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다. 최고 학부를 마쳤고 심지어 명예퇴직이라는 제도까지 있는 직장을 다닌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오사카 성주를 모른다는 건 일본에 대한 우리 교육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일본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장 많이 배우는 건 그들의 개화기와 근대다. 이유는 그게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메이지이신을 하고 체력을 기른 다음 조선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명칭도 그렇다. 명치유신(明治維新)이거나 메이지이신이지 메이지유신이라는 짬뽕은 대체 뭐란 말인가).반일(反日)의 기원 … 뭐가 됐든 지일(知日)이 먼저한국에서 반일이 정치적으로 활용된 건 최근의 일이 아니다. “나는 일본과 한국에 정상적인 통상 관계가 재확립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과거를 망각해야 할 것이며 또한 망각할 것이다.” 누가 한 말일까. 이승만이다.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