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에서 오일의 시대로

해군함정 연료, 석탄서 석유로 전환
전함 속도 높이고 병력 운용 효율 극대화
1차 세계대전서 석탄 쓰던 獨함대 무력화

미국, 석유산업 첫 단추 꿰다
19세기 중반 두통·치통 치료제로 쓰이던 석유
투자자들, 가연성 물질 주목해 연료 가능성 타진
530달러로 시작된 석유 연구, 인류의 삶 바꿔
그리스의 불을 묘사한 12세기 동로마제국의 삽화. 현대의 화염방사기를 연상케 하는 고대의 대량 살상용 비밀 무기였다.
그리스의 불을 묘사한 12세기 동로마제국의 삽화. 현대의 화염방사기를 연상케 하는 고대의 대량 살상용 비밀 무기였다.
1911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상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은 아마도 윈스턴 처칠이었을 것이다. 그해 7월 독일제국 빌헬름 황제가 모로코의 아가디르항에 군함을 파견해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처칠은 게르만족과 충분히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각의 ‘경제 제일주의자’들을 이끌던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라 주장하며 군비 확장파의 목소리를 제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독일 황제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해군 장관에 임명된 처칠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며 경제 제일주의자들을 납득시켜야 했다. 군비 강화에 주력하던 그는 기술적 사안 하나를 놓고 이번에는 군부(軍部)를 설득하는 데 진땀을 흘린다. 그것은 영국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해전(海戰)은 석유와 석탄의 싸움영국 산업혁명의 동력은 석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습관과 신뢰는 경로의존성을 갖기 마련이다. 군부는 안정적 공급이 가능한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 석유에 의존하겠다는 처칠의 주장에 반발했다. 사실 영국의 구축함과 잠수함 일부는 이미 석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의 중추인 주력 전함들은 여전히 석탄을 때고 있었다. 해전(海戰)의 핵심은 속력이다.

당시 영국 전함들의 평균속도는 21노트(knot)였는데, 처칠의 목표는 이걸 25노트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독일 함대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러자면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갈아타야 했다. 게다가 석유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빠르게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석탄 선적에만 선원 4분의 1을 투입하는 공정이 필요 없어 병력을 운용하는 데도 유리했다. 처칠의 뚝심은 결국 영국 해군을 석유 화력 전함으로 무장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여전히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독일 외양 함대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그 시기 독일제국의 강역에는 유럽 주요 석탄 산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독일인들은 안정과 익숙함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호머의 ‘일리아드’에도 등장하는 석유석유는 인류에게 낯선 물질이 아니었다. 등장은 석탄보다 빨랐다. 중국에서는 4세기부터 석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북송 때에는 보편화된 연료로 자리 잡았다. 석유로 추정되는 물질은 기원전 4000년 전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중동 여러 지역에서는 ‘역청(瀝靑)’이라 불리는 반(半)고형 물질이 지각의 균열된 부분에서 새어나왔는데, 중동의 신성한 불 숭배 사상이 여기에서 기원한다. 역청은 건물의 모르타르로 사용되거나 도로 건설에 활용되었다. 1세기경 로마의 기록에 따르면 역청은 먹거나 바르는 의약품으로 쓰였으며, 주로 지혈·치통·만성기침·절단된 근육의 봉합 등에 활용되었다. 백내장, 류머티즘 치료에서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역청은 무기로도 사용되었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는 트로이인들이 빠른 배에 꺼지지 않는 불을 싣고 배 위로 불을 내뿜었다는 구절이 나온다(트로이 전쟁은 동서양의 대결로 오해하기 쉬운데, 트로이전쟁은 같은 그리스 민족인 아이올리스인과 이오니아인들을 아카이아인들이 짓밟은 전쟁이다. 트로이 왕국이 있던 아나톨리아 반도에 튀르크인들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나서다). 이슬람 세력에 맞서는 동쪽 방어선이던 동로마제국의 3대 무기 중 하나는 ‘그리스인의 불’이라 불리던 석유와 석회의 혼합물이었다. 이 불은 한번 붙으면 잘 꺼지지 않았고, 심지어 물속에서도 활활 타 이슬람 병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지금처럼 분별증류가 가능한 원료로 석유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미국에서였다. 1850년대 미국 교수들의 봉급은 박했다. 그 때문에 실용적 기술을 익힌 교수들은 부업을 뛰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고, 당시 예일대의 실리만 교수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뉴욕의 한 투자 그룹으로부터 연구 용역을 제안받았는데, 그게 바로 석유의 앞날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었다. 식물성기름이나 동물성 유지와 구분하기 위해 ‘록 오일(rock oil)’이라 불리던 석유는 펜실베이니아 서북부에서 소량으로 채취되었고, 투자자들의 욕심은 이를 대량 생산해 액체 상태로 정제한 후 램프의 광원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의약품 아닌 광원으로서 사용 가능성 타진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투자자 그룹의 리더는 변호사인 조지 비셀이었다. 그는 모교인 다트머스대에 들렀다가 한 교수의 연구실에서 펜실베이니아산 석유 샘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다트머스대 졸업생이 가져다 놓은 것으로, 당시에는 두통·치통·위경련 등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고대 로마 시대의 용도에서 전혀 발전하지 않은 상태). 약명은 ‘세네카 오일’이었는데, 약의 치료 비법을 백인들에게 전수했다고 알려진 인디언 추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비셀은 이 검은 점성 액체가 가연성물질이라는 점에 착안해 의약품이 아닌 광원으로서의 사용 가능성을 타진했다. 실리만 교수에게 용역을 맡겼을 때 비용은 526달러 8센트였는데, 현재 가치로 2만6000달러 정도다. 이렇게 초라한 금액으로 시작한 미국의 석유 탐구는 1914년 들어 전 세계 생산량의 65%에 달하는 2억6000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는 폭풍 성장을 기록하며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