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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동맹들에 "지켜줄테니 세금 내라" 겁박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풀꽃만 그런 게 아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에게 그리스가 그랬다. 동쪽으로는 중국과 인도의 접경,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한 땅 부자 페르시아에 영토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지중해 무역을 위해 제국의 서쪽 연안 이오니아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다리우스는 전면적인 전쟁 대신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을 하나씩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페르시아의 황금은 언제나처럼 유능했다. 재물이 흘러 들어가자 이오니아 폴리스는 분열했고 곳곳에서 친(親)페르시아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어디에나 삐딱선은 있다. 불필요한 종족주의로 충만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反)페르시아 반란이 일어난다.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참교육을 하는 것은 제국의 기본 업무 아니던가. 페르시아의 창칼 아래 600년 역사의 밀레투스는 폐허로 변했고 시민들은 모조리 노예 신세가 된다. 사람이 하나를 얻으면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사실 다리우스는 그리스라는 나라를 잘 몰랐다. 장군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게 어디 있는 나라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런데 차지하고 보니 예뻤다. 그리스 본토에도 흥미가 생겼고 게다가 미운 폴리스가 있었다. 밀레투스가 페르시아에 대들 당시 지원군을 보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다. 탐도 나고 괘씸하기도 해서 다리우스는 아테네 정벌을 결심한다. 물론 전쟁 안 하고 협박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면 최고다. 기원전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에 사절단을 보낸다. 항복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 역사 기타

    부자들 "세금 더 내겠다" 경쟁이 나라지켜

    한국인의 ‘민주주의 사랑’은 극진하다. 지고의 선(善)으로 추앙하는 것은 물론 민주주의가 없으면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흥분한다. 애초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말을 일본어로 옮길 때 민주주의(democracy)의 초벌 번역은 ‘하극상’이었다. 나중에 어감을 좋게 해보겠다며 원어에도 없는 ‘주의’를 붙이는 바람에 민주주의라는 희한한 조어가 탄생했다. 수단에 불과한 민주제(制)가 졸지에 가치이자 목적이 된 것이다. 다른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 유명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는 데모크라시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석은 둘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을 안 했거나 혹은 그 단어가 가진 위험성이 너무 커서 피했거나.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링컨이 ‘민주’라는 말이 ‘지배언어’가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 다루면 인민의 권리에 이바지하지만 자칫 통제에 실패하면 나라를 골로 가게 만드는 게 이 민주주의, 데모크라시라는 설명이겠다. 한국인의 민주주의 사랑은 다소 집요하다. 그리스 아테네 여행을 다녀와서는 민주주의의 숨결을 느꼈다고 후기를 올린다. 초능력이다. 시차를 초월해서 있지도 않은 것을 느꼈다니 놀랍다. 엄밀하게 말해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위장한 귀족정’이었고, 여성과 노예를 배제한 인구 15%만을 위한 민주주의였으며, 시기심으로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쳐내는 우중(愚衆) 민주제의 표본이었다. 도편 추방이 대표적인 예다. 조개껍데기나 도자기 파편에 이름을 적어 3000표 이상을 적힌 사람을 쫓아냈는데(시민권자 5만 명, 평균 투표자 수 6000명) 현직에 있는 공직자만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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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유 달려간 '아줌마'…루이 16세 끌어내려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의 프랑스 ‘아줌마’들이 파리 남서쪽 베르사유궁전으로 행진을 시작한다. 아줌마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여성 비하 의도가 아니라 이 집단의 뉘앙스를 살리는 데 이만한 단어가 없어서다. 이들은 파리의 생선 장수였다. 억척스럽고 힘까지 좋은 이 근육질 아줌마들이 생선 다듬는 칼을 들고 20㎞에 달하는 행진을 벌인 것은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조언했다는 루머가 파리 시내에 퍼졌고, 그 말에 ‘꼭지’가 돌아버렸기 때문이다. 베르사유를 포위한 이들은 여섯 명의 대표를 뽑아 루이 16세에게 면담을 요구한다. 접견실로 왕이 들어오는 순간 이 중 한 명이 충격과 감동으로 기절한다. 말로만 듣던 왕을 처음 본 데다 루이 16세의 풍채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은 국민회의가 결의한 봉건제 폐지와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던 루이 16세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기어이 파리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사태는 루이 16세가 자초했다. 전쟁은 돈이 많이 드는 군주의 취미생활이다. 무려 72년 집권 기간 중 절반을 전쟁터에서 보낸 태양왕 루이 14세는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원금만 20억리브르라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사망한다. 유능하지도 않으면서 취미생활은 포기하지 않았던 루이 15세는 이익이 불분명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끼어들어 또 빚을 늘렸고, 루이 16세에 이르면 정부 수입의 대부분이 이자를 무는 데 들어갔다. 선대를 보고 반성할 만도 한데 그 역시 취미생활을 화끈하게 했다. 1763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20억리브르를 쏟아부은 것이다. 20억리브르는 3년치 국가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