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몽골전쟁과 임진왜란 '나비효과'

'사계절 궁핍' 몽골서 큰 칭기즈칸
종교·출신 달라도 능력 되면 중용

5대 쿠빌라이 칸, 두 차례 일본 침공
폭풍우로 좌절됐지만 日막부 치명타
훗날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 빌미 돼
제국의 창업자를 그룹 이름으로 내건 독일 팝 밴드 ‘칭기즈칸’. 이들은 동명의 곡을 히트시켰는데, 국내에서도 배우 조승우의 아버지 조경수가 부른 번안곡 ‘징기스칸’으로 인기를 끌었다.
제국의 창업자를 그룹 이름으로 내건 독일 팝 밴드 ‘칭기즈칸’. 이들은 동명의 곡을 히트시켰는데, 국내에서도 배우 조승우의 아버지 조경수가 부른 번안곡 ‘징기스칸’으로 인기를 끌었다.
헤로도토스는 부드러운 나라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들이 태어나는 법이어서 풍요로운 곡식과 용감한 전사들이 같은 땅에서 태어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파봐야 힘만 빠지는 땅과 씹을수록 허탈해지는 음식과 인간의 생존에 적대적인 기후에서 자란, 악에 받친 남자들이 전쟁에 강하다는 얘기겠다. 이 세 가지를 완벽하게 제공해 남자들을 구조적으로 전사(戰士)로 만드는 땅이 있으니 바로 몽골이다. 흔히 몽골 ‘초원’이라고 한다.

몽골의 초원은 푸르고 그림 같은 집이 있는 곳이 아니라 거지 같은 천막에다 나를 죽이려 드는 인간들만 득실대는 곳이다. 몽골어로 ‘강(gan)’이라 불리는 가뭄 때문에 초원의 풀은 늦여름부터 마르기 시작한다. 가축들이 굶어 빼빼해질 무렵, 이번에는 주드(dzud)라는 겨울 재해가 찾아온다. 우리는 섭씨 영하 10℃만 돼도 강추위라고 부르지만, 몽골의 추위는 평균 영하 35℃, 심할 경우 50℃까지 내려간다. 허기진 양들은 흙과 돌을 먹는다. 양들의 젖이 마르면 인간도 덩달아 굶어야 한다. 벌레와 쥐를 잡아먹으며 버티면 그때야 겨우 봄이 온다. 이런 곳이 이른바 몽골 초원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생존 원정을 떠날 법도 한데, 이들은 내내 그 생활을 반복한다. 수많은 부족으로 쪼개져 있다 보니 군사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약탈하고 죽이는 동안 서로에게 원한이 쌓여 더더욱 뭉치지 못하는 게 유목민족의 굴레다.

이때 등장한 루키가 칭기즈칸(어린 시절 이름은 ‘좋은 쇠’라는 뜻의 테무친)이다. 중급 부족장의 아들이던 칭기즈칸은 10대 초반 아버지를 잃는다. 독살로 리더가 사라지자 부족 구성원 대부분은 제 살길을 찾아 떠나고, 마을에는 여성과 아이들 아홉 명만 남게 된다. 이때 칭기즈칸은 교훈을 얻는다. ‘혈족이고 친인척이고 다 필요 없구나. 나는 앞으로 다른 기준으로 사람을 취하리라.’ 이러한 생각은 씨족 기반의 몽골 초원에서 이제껏 볼 수 없던 발상이다. 칸의 자리에 오르기 전 노예 생활은 물론 아슬아슬한 순간을 숱하게 넘겼지만, 그의 양아버지에게 당한 배신은 칭기즈칸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기였다. 칭기즈칸은 지지자 19명과 도망쳤고, 발주나 호수에서 흙탕물을 나눠 마시며 죽을 때까지 충성과 신의를 다하자는 결의를 한다. 이 19명 중 1명만 같은 씨족(친동생)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씨족 출신이었다. 심지어 종교도 다 달랐다. 타고난 조건을 문제 삼지 말 것, 능력이 있으면 중용할 것, 이게 그의 제국을 위대하게 만든 동력이었다.

몽골 초원을 통일한 후, 칭기즈칸의 행보는 남달랐다. 보통은 남하해 한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눌러앉아 교양인 행세를 하는 것이 이민족 왕조의 수순이다. 하지만 그는 남쪽으로 가는 대신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서양의 길목을 차지하고 앉아 육상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호라즘 왕국(현재 이란, 우즈베키스탄)을 공략한 것이다. 3년여 전투 끝에 호라즘을 굴복시킨 칭기즈칸은 다음 원정지에서 병사하지만 후손들도 만만치 않았다. 2대 오고타이 칸 시기에 몽골군은 헝가리와 폴란드 전역을 휩쓴 후 오스트리아 빈 앞까지 진출한다. 오고타이가 급성 심장마비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유럽에도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5대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괴멸시킨 후 바다 건너 일본에 입맛을 다신다. 쿠빌라이의 타깃이 된 불운한 일본 정권은 가마쿠라 막부였다.

1274년과 1281년,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감행한다. 그를 좌절시킨 것은 폭풍우와 바람이었고,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신풍(神風, 음독으로 신푸)’이라고 불렀다.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받은 타격은 엄청났다. 막부의 재정은 거덜났다. 몽골과의 전투에 참가한 고케닌(쇼군과 주종 관계에 있던 사무라이)들의 사정은 더 심각했다. 자비를 들여 전쟁에 나가고, 이긴 다음에 전리품으로 정산을 하던 시대였다. 몽골과의 전쟁은 방어전이었고, 보상을 청구할 곳은 없었다. 궁핍으로 고케닌들의 불만은 쌓여가고, 막부는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름뿐이던 천황이 막부 타도를 외치고, 내전이 벌어진다. 막부는 유력 고케닌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토벌대장으로 투입하지만 전세의 유불리를 따져본 그는 천황 편으로 돌아서며 칼끝을 막부에 돌린다. 그렇게 일본 최초의 무인 정권이자 3대(三大) 막부 중 최초인 가마쿠라 막부의 시대는 끝이 난다. 천황의 통치는 미숙했다. 쿠빌라이가 재미 삼아 찔러본 감은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입에 떨어졌고, 그는 바로 무로마치 막부를 차린다.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정욱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천황은 또다시 식물인간 신세. 보상 없는 전쟁으로 인한 정권 붕괴는 250년 후 재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하 장군들에게 조선 팔도를 미리 분양했다가 부도를 낸 임진왜란이다. ‘그놈의 이순신은 왜 하필 이때 태어난 것이냐.’ 도요토미는 아마도 이렇게 탄식하며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