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교양 기타

    메도루마 슌 '물방울'

    도쿠쇼가 쓰다이시미네.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썼다.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썩 괜찮은 소설이다. 처음 쓸 무렵에는 이런 굉장한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구상하게 된 계기도 하찮았다. 습기에 지쳐 창턱에 몸을 의지하고 마당을 내다보며 가려운 발가락 틈을 긁다가 말이다, 동과(冬瓜)가 열린 것을 보았다. 넓은 잎 틈으로 벌써 내 넓적다리만하게 열매가 자라 있었다. 이시미네. 우리가 군인의 신분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채로 미군을 피해 구덩이에 누워 있을 때, 다른 것 말고 시원하게 얼린 동과 한 점을 씹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금에 절인 반찬으로나 올라오는 동과를 보고, 나, 도쿠쇼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굉장한 것을 말이다. 최근 요양 차 마을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 선생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을 생각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선생에게 추천을 받으면 신문에 내 이름을 싣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후련해질 것이다. 이시미네, 너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었다고 이름 석 자 실리지 못할 신문에, 살아서 이름이 실리는 꼴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신문에 실릴 경우 원고료라는 것도 받게 되는 모양이다. 그 돈을 받아 여름 웃옷을 마련하고 싶다. 지금 입는 것은 소매가 너무 닳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걸린다. 전쟁 때 눈물 나는 이야기를 팔아 돈을 벌면 벌을 받는다고 마누라 우시는 핀잔을 주었지만 책도 읽지 않는 여편네가 알 일이냐. 조만간 원고를 가지고 선생을 찾아갈 생각이다. 이시미네. 어제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하찮은 것을 써두고 굉장한 것을 썼다고 말했다니

  • 교양 기타

    조지 오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인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이상한 짓’을 꽤나 많이 해본 치들로 알려져 있다. (물론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 나만 해도 실은……) 범위와 양상이 하도 다양해서 그 이상한 짓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 짓도 훗날 결과적으로 이상한 짓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아무튼 소설가들은 괴이하고 수상쩍고 유별나고 생뚱맞은 경력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소설가의 밑천이다. 때문에 이상한 짓은 짐짓 장려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짓을 곰곰이 되새기고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과정 자체가 바로 창작이라 할 수 있다. (반추나 성찰 없이 이상한 짓의 장려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가 아닌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안타까운 현실!)‘그’로 돌아가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 분명 넘치도록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하고 기묘한 경력이다. (다른 소설가들의 각종 일탈과 스캔들이 살짝 평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바로 조지 오웰(1903~1950), 자신이 코끼리를 쏴 죽인 전후 사정을 글로 남겼다(‘코끼리를 쏘다’-1936). 20대 초반의 5년간,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한다. 어느 날 그는 사육장을 탈출한 코끼리가 마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신고를 받는다. 코끼리는 이미 집과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을 해쳤다. 사정을 살피러 현장으로 간 그는 끝내 코끼리를 사살하고 만다. 그는

  • 교양 기타

    <51> 페데리코 안다아시 '해부학자'

    유물론자들의 유쾌한 농담여기 두 명의 콜럼버스가 있다.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탐험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사람이라면, 여자라는 미지의 땅에 발견의 깃발을 꽂은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가 다른 한 사람이다. 르네상스라는 ‘발견’의 시대에, 하나는 새 땅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의 크기를 두 배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영역을 두 배로 넓혔다. 그로써 둘은 근대를 열어젖혔다. 『해부학자』는 실존인물인 16세기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여자의 클리토리스(그는 여기에 ‘비너스의 사랑’이란 이름을 붙였다)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보의 발견을 안팎에서 추동한 두 명의 여성이 있다. 하나는 제노바 제일의 창녀 모나 소피아. 그녀는 해부학자의 사랑을 거절한 미의 화신이었다. 콜롬보는 쓰디쓴 상처를 안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한 탐험을 시작한다. 또 하나는 피렌체 제일의 열녀로 알려진 미망인 이네스 데 토레몰리노스.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저 기관을 발견한다. 그곳을 문지르자 그녀의 병이 나았고 그녀는 사랑의 정념으로 불타올랐다. 이를 과장된 음란함이라 불러야 할까? 우스꽝스럽게도 바로 그 이유로 이 소설은 문학상 시상을 거부당했다. 터무니없는 얘기다. 이 발견을 전하는 소설의 어조는 우화적인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비너스의 사랑’을 애무한다고 해서 여자를 정복할 수 있다는 해부학자의 결론은 유머지 과학이 아니다. 모든 여자를 악마의 자식, 유혹의 대리인이라 부른 중세의 세계관이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본래 유머는 권위, 맹신, 억압,

  • 교양 기타

    (50) 존 치버 '팔코너'

    억압과 소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고통을 묘사하는 어떤 수사(修辭)도 현실의 무수한 개별적 고통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나는 고통에 대해 다만 멀리서 응시하는 소설이 좋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 멀리서, 라는 표현은 물론 몹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럴 때 내 거리감각의 기준이 되는 작가는 언제나 존 치버다. 치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막 첫 책이 나왔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계속 소설을 쓰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방송국에서 단막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나에게 새 드라마의 작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얘기를 하게 되었다. 혹시 존 치버를 읽어보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이름은 들었지만 아직 읽어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백했다. 언젠가는 꼭 「다리의 천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절판되지 않은 치버의 한국어 번역본은 정우사에서 나온 『주홍빛 이삿짐 트럭』뿐이었다. 간신히 한 권을 구했다. 맨 앞에 실린 단편을 읽은 후 나는 어떤 소설은 한 인간의 내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거기 실린 단편들을 차례로 다 읽은 후에는 책을 덮고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요. 아마도 나는 더듬더듬 말했을 것이다. 드라마를 쓸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과 나눌 시간이 없는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이 쓰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도, 내가 「다리의 천사」의 세계에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소

  • 교양 기타

    (49) 쓰시마 유코 '웃는 늑대'

    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모험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여러 문헌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도도하고 날렵한 짐승의 카리스마를 한껏 서술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의 무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는 묘지로 옮겨간다. 글의 배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일본이다. 묘지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은 배가 고프면 새를 잡아 구워 먹고 밤이 되면 낡은 모포 속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이는 무덤 앞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한 세 남녀를 발견한다. 불륜 관계인 여자와 화가,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한 덕에 죽기 직전의 여자는 가까스로 구출된다. 이 일로 인해 더이상 묘지에서 살 수 없게 된 두 부자는 다른 곳을 떠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객사하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이 된 아이는 무덤가에서 죽은 화가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어린 딸과 마주친다. 그렇게 만난 열일곱 살의 소년과 열두 살의 소녀는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서로를 『정글북』에 나오는 ‘아켈라’와 ‘모글리’라 부르기로 약속한다.이 무렵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여섯 살쯤 되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남자아이와 함께 눈이 펑펑 내리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름이나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살이 까무잡잡하고 콧등에 작은 흉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스름해진 저녁 하늘 아래를 종종걸음 치며 걸었다. 그애는 집에 늦게 들어가서 할머니께 혼날 게 분명하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그애에게 어른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애는 솔깃해했다.“버스를 타

  • 교양 기타

    (48) 하인리히 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수화기 너머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광대의 독백…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하인리히 뵐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던 문학청년 시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자주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하인리히 뵐의 책을 처음 만난 것도 헌책방에서였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희귀한 책들의 설렘이란 어떤 다른 종류의 감응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경이에 가득 찬 경험이었고, 누렇고 빛바랜 페이지의 갈피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기록이나 낙서들, 메모들, 때로는 어떤 편지 비슷한 쪽지들이나 영수증 따위의 목록은 헌책방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진귀한 보물들이다. 하인리히 뵐의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라는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하던 순간의 경이에 대해 나는 자주 후배들이나 대학의 강단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지금은 절판이 되어버린 이 책을 틈날 때마다 소개하는 이유는 책 속에 담긴 한 문장 때문이다. “작가는 대충 임신할 수 없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의 상상력은 이미 너희 안에서 완전히 임신되어 있다고. 그것을 꺼내는 일이 문학이 아니라, 그것을 먼저 응시하는 일이 인간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시간이 흘러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농밀하게 작가의 뜻에 교감하게 되었다. 전후 독일의 폐허문학 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가에게 상상력이란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한 자가 바라보는 새로운 과제였고, 그에게 문학이란 그 폐허 위에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

  • 교양 기타

    (47) 이즈미 교카 '고야산 스님'

    아련한 통증 같은 불가해함쓰레기를 태우다가 비닐농이 손가락 끝에 떨어져 물집이 잡혔다. 팥알보다도 작은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잡아 뜯었는데 의외로 피부 깊이 뜯겨 나왔다. 금방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팥알처럼 붉은 화상이 된 것이었다. 마침 그것이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이어서 여러 날 동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랍 속의 이런저런 연고를 바르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아픔은 간지러움 비슷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어서 뻐근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만질 때만이 그랬다.그 작은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소설 「고야산 스님」의 감상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처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만지면 뻐근하게 전해오는 무엇이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나 그 초점에서는 아련히 타는 감정이 고인다.이렇게 시작한다. “참모본부가 편찬한 지도를 또다시 펼쳐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워낙 길이 험난하다보니 손대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여행용 법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표지 달린 접책을 끄집어냈다네. 히다(飛)에서 신슈(信州)로 넘어오는 깊은 산속에 뚫린 샛길은 잠시 쉬어갈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지.”‘저쪽’에 참모본부가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는 원시림 속이며 주인공은 ‘법의’를 입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길 위에 있다. 길 가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도인(道人) 혹은 스님이다. 길을 내는 자라 해도 되겠고 길을 닦는 자라 해도 되겠다. 이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 전통 사회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라

  • 교양 기타

    (46)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그때 달려간 토끼는 어디에 있나지금 나이의 절반쯤 되었을 때 내게는 ‘미국 3부작’처럼 여겨졌던 세 편의 소설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호밀밭의 파수꾼』『달려라, 토끼』였다. 어째서 내가 이런 3부작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때까지 이름이라도 들어본 미국 작가들이 많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다. 나는 대전의 헌책방들을 뒤졌고, PC통신의 중고책 장터를 눈여겨보았다. 아마 몇 군데의 도서관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어디에도 없었다. 토끼는 이미 항상 어디론가 달려가고 없었던 것이리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때, 카투사로 복무하던 대학선배의 미군 주소지로 이 책의 원서를 배달받았다. 총 4부작인 토끼 시리즈가 한 권으로 묶여 있는 책이었다. 한데 그 책은 단 두 쪽만을 읽었을 뿐이다(그 책은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드릴 의향이 있으니 알려 달라. 목침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우니 이 점 염두에 두시고). 『달려라, 토끼』를 읽게 된 것은 지금 나이의 절반이었을 때보다 꼭 그만큼 더 나이를 먹고 난 뒤였다. 한마디로 최근이라는 말이다. 그사이 나는 많은 미국 소설들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 부캐넌이 저택의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레코드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만이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미국의 장면들을 구성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