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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47) 이즈미 교카 '고야산 스님'

    아련한 통증 같은 불가해함쓰레기를 태우다가 비닐농이 손가락 끝에 떨어져 물집이 잡혔다. 팥알보다도 작은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잡아 뜯었는데 의외로 피부 깊이 뜯겨 나왔다. 금방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팥알처럼 붉은 화상이 된 것이었다. 마침 그것이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이어서 여러 날 동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랍 속의 이런저런 연고를 바르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아픔은 간지러움 비슷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어서 뻐근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만질 때만이 그랬다.그 작은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소설 「고야산 스님」의 감상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처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만지면 뻐근하게 전해오는 무엇이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나 그 초점에서는 아련히 타는 감정이 고인다.이렇게 시작한다. “참모본부가 편찬한 지도를 또다시 펼쳐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워낙 길이 험난하다보니 손대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여행용 법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표지 달린 접책을 끄집어냈다네. 히다(飛)에서 신슈(信州)로 넘어오는 깊은 산속에 뚫린 샛길은 잠시 쉬어갈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지.”‘저쪽’에 참모본부가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는 원시림 속이며 주인공은 ‘법의’를 입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길 위에 있다. 길 가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도인(道人) 혹은 스님이다. 길을 내는 자라 해도 되겠고 길을 닦는 자라 해도 되겠다. 이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 전통 사회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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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그때 달려간 토끼는 어디에 있나지금 나이의 절반쯤 되었을 때 내게는 ‘미국 3부작’처럼 여겨졌던 세 편의 소설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호밀밭의 파수꾼』『달려라, 토끼』였다. 어째서 내가 이런 3부작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때까지 이름이라도 들어본 미국 작가들이 많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다. 나는 대전의 헌책방들을 뒤졌고, PC통신의 중고책 장터를 눈여겨보았다. 아마 몇 군데의 도서관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어디에도 없었다. 토끼는 이미 항상 어디론가 달려가고 없었던 것이리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때, 카투사로 복무하던 대학선배의 미군 주소지로 이 책의 원서를 배달받았다. 총 4부작인 토끼 시리즈가 한 권으로 묶여 있는 책이었다. 한데 그 책은 단 두 쪽만을 읽었을 뿐이다(그 책은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드릴 의향이 있으니 알려 달라. 목침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우니 이 점 염두에 두시고). 『달려라, 토끼』를 읽게 된 것은 지금 나이의 절반이었을 때보다 꼭 그만큼 더 나이를 먹고 난 뒤였다. 한마디로 최근이라는 말이다. 그사이 나는 많은 미국 소설들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 부캐넌이 저택의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레코드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만이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미국의 장면들을 구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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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에밀 졸라 '목로주점'

    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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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그녀, 슬픔의 식민지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니말 트리스테(animal triste)’다. 독일 작가의 독일어 소설이지만 이 단어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나는 라틴어를 모르지만 이 두 단어가 들어있는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알고 있다.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즉,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풋내기 수도사 아드소는 야생적인 소녀와의 첫 경험 이후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을 최초로 실감하면서 저 관용구를 상기한다.) 혹은 더 리듬감을 살려 ‘post coitum, animal triste’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짐승의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만의 특수한 진실이라는 듯이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니카 마론이 저 관용구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중년의 나이에 짧은 기간 동안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눈 이후(post coitum), 수십 년의 세월을 그 사랑만을 추억하며 살다 육체와 정신의 모든 부분이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 버린 한 여자(animal triste)의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그녀는 제 나이를 모른다. 아마 백 살쯤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4~50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고 모든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결혼을 했고 남편과 20년을 살았으며 딸 하나를 키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 증세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들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자문했다. 만일 그날의 발작으로 내가 죽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놓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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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별놈의 학교가 다 있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나는 이 질문의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행동 양식 하나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그만인 소설은 습기 찬 방구석에 멀찍이 놔두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은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인, 노트북 뒤에 탑처럼 쌓아두는 것이다.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소설책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거나, 그걸로도 모자라면 큼지막한 별이 밑줄 옆에 꼬리처럼 달려 있거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제법 중요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야무지게 접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책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있고, 연필심이 번져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은 내가 그 책을 흠모하는 방식이자 좋아한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나는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거나 막연히 뭔가가 읽고 싶어질 때면 몰래 그중 한 권을 빼들고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염탐하듯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또 만져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음에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낸다 해도 풀지 못할 것만 같은 탄생의 비밀이다. 내겐 불길한 예감이다. 이 책은 내 노트북 뒤에 놓여 있는 몇 권 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벤야멘타 하인학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의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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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

    냉정하거나 유쾌한 난투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나는 대자연으로부터조언을 구했다. 언덕의 휘우듬한 선처럼 둥글게 솟고 떨어지는 느긋한 능선과 깊은 골짜기 아래 나는 살았다. 검은 구름수레가 몰려오면서 잎잎에 빗줄기가 후드득 듣기 시작하는 때와 눈보라의 뒷등이 누군가에 의해 밀려나가는 때를 나는 특히 좋아했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숲의 법칙과 물의 법칙을 모두 배웠다. 마치 『정글북』에서 느림보 갈색 곰 발루가 모글리에게 썩은 가지와 튼튼한 가지를 구별하는 법, 벌집에 다가갈 때 벌들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법, 물웅덩이에 첨벙 뛰어들기 전에 물뱀에게 경고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듯이. 말하자면 나는 『정글북』에서 정글의 존재들이그러했듯이 “너와 나, 우린 피를 나눈 형제야!”라고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작고 큰 생명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 속삭이고 대화하는 것을 보고 들었던 것이다.1894년 출간된 러디어드 키플링의 『정글북』은 1907년 키플링에게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겨주었고, 지금도 여전히아동문학의 고전으로서 세계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메수아의 아들 나투(모글리)가 호랑이에게 쫓기다 늑대 가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힘과 꾀로 무리를 이끄는 늑대 아켈라, 호랑이 시어칸, 자칼 타바키, 흑표범 바기라, 야생 코끼리 하티, 솔개 칠, 비단구렁이 카 등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모글리는 이들과 어울리고 경쟁하고 싸우면서정글의 법칙을 배우게 된다. 정글로부터 추방되었던 모글리가 소떼를 몰아서 악독한 수장 시어칸을 죽임으로써 용맹을 떨치는 장면으로 일단락된다.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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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절망'

    완전 범죄? 완벽한 소설을 꿈꾸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제목만큼이나 강렬하고 아찔한 소설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더미 속에서 ‘분신’과 ‘범죄’가 포착된다. 하지만 환상적인 고딕풍의 범죄소설이 펼쳐지리라는 독자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서른여섯 살의 러시아계 독일인으로 변변찮은 초콜릿 사업자이다. 1930년 5월9일, 업무차 프라하에 들렀던 그는 풀밭에서 자고 있는 한 부랑아가 자신과 무척 닮았음을 확신하고서 모종의 영감에 휩싸인다. 문학 속의 분신을 현실로 불러내듯 문학 속의 범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 분신이라는 개별성과 유일성을 위협하는 요소를 이용해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것. 그 과정에서 많은 거짓말이 창조된다. 펠릭스를 꾀기 위한 현란한 수다는 물론이거니와 아내 리다 앞에서 거국적으로 털어놓는 동생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에 가깝다. 게르만의 미학적 환희가 극점으로 치달아갈수록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자기기만이다. 펠릭스는 정말로 그와 닮았는가. 그의 범죄는 정말로 ‘무관심’과 ‘무목적’의 행위(예술)인가. 혹시 기울어져가는 사업을 만회하려는 속된 욕망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리다와 아르달리온의 ‘부적절한’ 관계는 또 어떠한가. 이런 식의 거짓을 전혀 몰랐다면 그는 나보코프의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눈 뜬 장님인 것이고, 만약 알았다면, 알고도 죽였다면 정녕 희대의 악당인 것이다.파리의 한 호텔에서 범행의 기록에 열중하던 중 게르만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언급한다. 라스콜니코프를 괴롭힌 묵직하고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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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리카르도 피글리아 '인공호흡'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당신은 말로써 당신을 잘 표현하는가? 당신은 선동적인가? 당신은 궤변론자에 속하는가? 당신은 쓸데없는 말이라도 늘어놓지 않고선 배기지 못하는가? 당신의 말이 씨가 된 적이 있는가? 그러길 바란 적이 있는가? 침묵을 강요당한 적은 있는가? 당신은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하길 택하는가? 아니면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선택한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도 도저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세계’가 있는가?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당신은 어떻게 말하는가? 혹시 글을 쓰는가? 당신이 글을 쓴다면 바로 그런 것을 쓰는가? 무슨 방법으로 쓰는가? 그런데 만약 이 세계에 말을 빼앗긴 이름 없는 자들이 널려 있다면? 여기저기에.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에는 사실인지 허구인지 모르겠으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두 사람,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상반된 세계에 속해 있던 두 사람에 대한 일화가 소개돼 있다. 훗날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독재자가 될 사람. 하지만 그때까지 가진 것은 계획과 말뿐이었던 비루하고 소심한 남자가 프라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1909년 10월부터 1910년 8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아르코스 카페에 나타났다. 그는 거기서 자기 연민과 망상에 가까운 자기중심성, 미래에 대한 과도한 강박 관념을 예술가들에게 뜨겁게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의 말을 들었던 사람 중 하나는 프란츠 카프카였다. 요설을 늘어놓던 남자는 히틀러였다. 몇 번의 우연한 만남 동안 카프카는 히틀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말은 씨가 되는 법이에요. 말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