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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20)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더 많은 불행, 더 많은 환란을! 중독은 대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술이나 문장에 중독되는 건 문장에 심취해서도 술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하고 취하려 애쓰는 척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경향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은 타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중독엔 딱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있다면 그건 중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의 속도와 관련될 뿐, 어떤 일관된 내용과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그저 빠지기 위해 빠져들 뿐이다. 《몰락하는 자》는 내뱉기에 중독된 자의 처절한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글렌과 냉혹성, 글렌과 고독, 글렌과 바흐, 글렌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난 생각했다. 글렌과 산림 스튜디오, 인간에 대한 글렌의 증오, 음악에 대한 증오, 음악인에 대한 증오, 난 생각했다. 글렌과 간결함, 식당을 둘러보면서 난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아야 해, 난 생각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계의 이단아로 통한다. 셋은 공히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으나 모국에 대한 분노와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의 언어 살해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종종 같은 범주로 묶인다. 하지만 문학사의 특정 경향은 한약방의 약재 상자처럼 일목요연하게 분류될 수 없는 법이다. 문학은 결국, 어떤 개인의 지독한 체취에 불과할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 안의 요설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방식으로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오스트리아 문학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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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소설가의 삶 가령 이런 칼이 있습니다. 누대를 이어온 장인이 만든 이 칼은 자르는 식재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이 칼로 다듬은 생선은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다른 칼로 뜬 회와는 맛이 확연히 다릅니다. 세포의 변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요. 과일을 깎아두면 색과 맛이 변하지 않으며 양파를 다져도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이 칼로 살아있는 짐승을 단칼에 베면 처음엔 선명한 근육의 결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제야 피의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을 것이며 이윽고 천천히 방울져 맺히는 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인간 혹은 세계를 한 개의 오렌지라고 가정해볼까요. 소설이란 어떤 형식으로든 이 오렌지를 잘라서 접시에 담아내는 요리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혹은 잘게 다져 즙을 낼 수도 있겠지요. 다만 칼 한 자루로.일상과 영혼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베어낼 수 있는 칼. 처음엔 선명한 단면을 보여주고 다음엔 그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냄새를, 마침내 과즙 대신 방울져 나오는 피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칼.소설가라면, 영원한 젊음보다는 이런 칼과 자신의 영혼을 바꾸자는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쩌면 누군가와 이런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가입니다. 마침내 그 칼을 손에 쥔 그는 가장 먼저 저 자신의 삶을 요리해서 접시에 올려놓았습니다. ≪가면의 고백이지요.≪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출생부터 이십대 중반의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을 써내려간 자전 소설입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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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다자이 오사무 ‘쓰가루’

    살아 있으면 또 훗날 이봐, 얼른 이쪽으로 들어오게. 자네가 그런 데서 어정거리면 놈들이 도망쳐버리거든. 도깨비들 말이야. 여기 산벚나무 뿌리 구멍 안에 숨어 있으면 그들이 오는 게 보인다네. 아, 그건 총알자국이 아니야. 전쟁도 여긴 비켜갔거든. 가까이서 보니 자넨 좀 멍청하게 생겼구먼. 아니, 그냥 이야기를 좋아하게 생겼단 말이네. 자네처럼 얼굴이 홀쭉하고 귀가 큰 사람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맞지? 자, 내게 마침 책 한 권이 있네. 달도 무겁고 바람도 쓸쓸하니 책 읽기 딱 좋은 때가 아닌가 말이야. 자네 혹시 다자이라고 알고 있나? 다자이 오사무, 그래 그런 이름이네. 다자이는 분명 연인과 자살이니 약물중독이니 허무주의에 자기혐오로 유명하네. 그러나 어떤가, 그의 생이 오로지 비극과 고통으로만 점철되었을 것 같은가? 다자이라고 왜 호쾌하고 천진하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바로 맞혔네, 내가 가진 책이 바로 그렇다네. 놀라지 말게, 여기서 다자이는 무려 “독자여 안녕! 살아 있으면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라”고 외친단 말일세.≪쓰가루≫란 말이지. 그래, 좋은 곳을 펴는군. 여기서 다자이는 쓰가루 반도의 온갖 곳을 쑤시고 다니며 그곳에 대해 떠들어댄다네. 왜냐고? “괴로우니까.” 자네, 뿌리를 부정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나? 혈육과 절연한 채 그들을 삿대질하다 그조차 괴로워 비난을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고통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나? 그건 말일세, 모래폭풍이 이는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과 같다네. 희망이나 신기루 같은 낭만적인 것은 없네. 죽음. 그래, 바닥 없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까이 있지. 그런 삶을 살던 다자이가 자신의 고향이 있는 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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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슈테판 츠바이크‘체스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겁쟁이들의 이야기슈테판 츠바이크는 겁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늘 절망 직전의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기대가 컸고 그만큼 요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참여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츠바이크의 삶을 소설로 쓴 로랑 세크직에 의하면 그는 문학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비난을 받을 만큼 받았다. 그는 인물들의 광기 어린 열정 외에는 세상에 달리 말하고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대단히 많은 인물들에 대해 쓴 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에라스무스, 메리 스튜어트, 발자크, 두루두루… 그건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은 실제로 타인의 마음 상태를 흉내 낼 수 있고, 자신 안에 있는 감정들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의 행동인 양 뇌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이입을 참 잘한 작가였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영혼을 깊게 파고들고 오래 붙들면서 쉬지 않고 글을 썼다.하지만 그는 센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에, 유명세에, 기대치에, 의무에 시달리면서 그는 자신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더이상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이 없었고, 그의 정신 어디에서도 중대한 진실이 솟아날 구석을 찾을 수 없었으며,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는 출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했다. 사람의 뇌는 지속적으로 고통에 노출이 되면 손상된다. 술이 그렇게 만드는 것처럼. 처음부터 행복할 줄 몰랐던 그는 마지막까지도 행복해지는 데 실패했다. 결론은 자살이었다.영혼의 반려자였던 ‘강한’ 첫번째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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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키 작은 할아버지 괴테와 연애하게 된 사연 괴테가 살았던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몇몇 작가와 독일문학 전공자, 그외 여럿이 함께였어요. 대문호 집을 구경하는 풋내기 소설가는, 그야말로 부잣집에 심부름 간 촌뜨기 하녀였습니다. 뭔가 압도당하는 기운에 입을 쩍 벌리고 섰다가, 괜히 심사가 뒤틀려 뭐 하나 주워갈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러다 마침, 흠잡을 게 눈에 띄었습니다. 침대. 괴테의 침대라고 하는데, 크기가 너무 작아요, 작아도 너무 작아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지요. 괴테가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기럭지가 어떻게 이렇게 짧을 수가 있어? 기럭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짝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혼쭐이 났습니다. 대문호 괴테에게, 기럭지가 뭐야, 키도 아니고 신장도 아니고. 어디 감히, 괴테에게, 건방지게.진짜 혼났습니다.고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농담이라고는 씨도 안 먹히게 생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덩치는 어찌나 큰지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혼쭐날 것 같죠, 딱 심술 맞고 꼬장꼬장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같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그런 노인네와 한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그러니 맛도 안 보고 등을 돌리지요.꼰대하고는 안 놀아. 신과 악마, 선과 악, 비극과 구원을 담은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그런데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조금만 친해지면 꽤 재밌어집니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한 쌍입니다. 파우스트를 놓고 신과 내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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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염소의 축제'

    고통의 독서, 보상은 어디에?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세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래 격조했던 친구보다는 날마다 통화하는 친구와 할 말이 더 많은 법이다. 잘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새로 발견한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고고학자처럼 비좁은 미로를, 설계도 한 장 없이 손으로 더듬으며 따라 내려가야 한다. 그곳은 낯설고 어두우며 적대적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바로 그런 책이다.이 짧지 않은 소설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별명이나 애칭으로도 불린다.혼란이 가중된다.배경은 도미니카 공화국. 낯선 나라다.이 역시 장애물이다.주인공은 또 어떤가? 전설적인 독재자 트루히요다. 독재자와 그에 대한 암살 음모가 소설의 주요 동력이다. 정치는 한국 소설이 외면해온 영역이다.우리나라 작가들은 정치를 여간해서는 다루지 않으며 따라서 독자들도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이 1960년대다. ‘과거는 외국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의 갭은 그 자체로 장벽이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벌어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의 암살을 중심으로 독재와 정치, 인간성의 문제를 천착한 소설이다. 출판사의 영업자라면 숨기고 싶을 요약이다(아마 ‘노벨문학상 수상작’ 같은 문구로 대신할 것이다). 이제 피라미드의 내부로 내려간다.우선 지도가 필요하다.은유가 아닌 진짜 지도 말이다. 무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최소한 우리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아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이라는 최강대국 근처에 자리 잡은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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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어두운 다락방에서였다. 집안 식구들 중 아무도 들춰보지 않던 거실의 세계문학전집은 곧 다락방 차지가 되었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밖에 나갈 수 없던 나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금빛 글씨가 반짝거리던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곧 오래된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무슨무슨 스키와 같은 익숙지 않은 이름들,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세로줄 쓰기에 눈이 어지러워 책을 덮었다. 고전이 전화번호부만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의 ‘기’를 짓누르는 건, 세계 공통이다. 도대체 짧게 쓴 ‘고전’이란 게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걸작’이라 부르는 책들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게다가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정독하게 된 건 그러므로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고해성사를 하자면, 고전은 작가들도 읽기 ‘되게’ 힘들다(그러므로 ‘고전’이란 몇 번의 실패와 포기 끝에 ‘마침내’ 읽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뿐인데, 실상 그 내용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횡설수설한다고 적어놓았을까.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그녀가 기차에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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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나는 톰이다, 나는 소년이다! 당신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소? 누군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한 가지다. "엉망진창으로 십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이다. 에엣? 장기간의 습작이나… 뭐… 노력 같은 거… 그런 게 필요한 거 아닌가요?또 묻는다면 "다 필요 없어요. 그저 엉망진창으로 보낸 한 시절이 필요한 겁니다"라고 나는 다시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망가진(혹은 망가져본) 인간만이 작가가 될 수 있다. 만약 망가진 적이 없는데도 작가가 된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변태다. 지금 내가 뱉은 이 말을 백프로 믿어도 된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공부는 지지리도 못해, 수업 시간엔 만날 졸아, 입만 열면 뻥이고, 머릿속엔 잡생각뿐 몰라 몰라 될 대로 되라지,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하고, 하라는 짓은 너나 하세요, 어른 알기를 개코로 알지, 어딜 가나 문제만 일으키는 이 소년의 이름은 톰 소여다(참, 그는 좀처럼 씻지도 않는다… 친구인 허크는 더하지). 19세기의 미국 남부, 작가 마크 트웨인이 가공해낸 세인트피터스버그라는 작은 마을의 이 악동은 그 후 140살이 되어가도록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 긴 말 필요 없이 그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소년이요, 성공한 인간이다. 현대는 끝없이 근대의 모험을 모함해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물론 수천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벌의 시대도 항해의 시대도, 전쟁과 혁명의 시대도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이 문장이 능동태인지 수동태인지에 대해선 또 많은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가 필요로 하는 건 얌전한 인간이다. 겁먹고, 안주하고, 근면 성실하고, 일하고, 자네 이것밖에 안 되나? 낯을 붉히고, 광고 좀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