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내가 만난 운명의 Book (3) 박완서 성장소설 2부작 <싱아…>와 <그 산…>
[Book & Movie] 싱아와 은방울꽃이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우리가 부수고 나와야 할 '옛 질서'로 그려
               조우석
           문학평론가
조우석 문학평론가
사실 성장소설만한 읽을거리도 흔치 않다. 성장소설이란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서 청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육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보통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헤세의 《데미안》 등이 명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나는 몇 해 전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성장소설 2부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 《그 산이 거기 정말 있었을까》(이하 그 산)를 우리 시대 명작 성장소설로 추천한다.

헤세·괴테가 주로 자아 형성의 이야기라면, 두 작품은 우리 현대사와 얽혀든 성장담이라는 차이가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라서 더욱 살갑게 읽히는 데다 스토리텔링의 힘도 뛰어난 게 《싱아》와 《그 산》이 갖는 미덕이다.

빨려들 듯 읽히는 두 소설의 내용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박완서 선생은 1931년 태어났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1930년대 개풍(개성) 박적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일제시대, 이후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를 그려냈다.

[Book & Movie] 싱아와 은방울꽃이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우리가 부수고 나와야 할 '옛 질서'로 그려
박완서 선생이 1931년생이라는 것은 그 분이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 산업화에 이르는 현대사를 모두 체험한 세대라는 뜻이다. 조금 전 이 두 소설이 박완서 문학의 원형과 모티프가 모두 녹아 있는 문제작이라고 했지만, 그게 지난 시대 삶의 세목(細目), 즉 디테일에 대한 증언으로 훌륭하다는 점이 놀랍다. 요즘 역사학에서는 그런 걸 사회사·풍속사 혹은 일상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더욱 값을 높이 쳐준다.

정치-경제사나 거시사 등보다 훨씬 인간다운 살냄새가 풍기는 역사라는 뜻이다. 그 중 하나가 우리의 현대 유통사-상업사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인 미군 피엑스(PX)와, 그곳에서 미군들을 위한 초상화를 그려주던 화가 박수근에 대한 묘사는 아주 뛰어나다. 6·25전쟁 당시 그곳에 취직했던 여대생 박완서의 눈으로 포착한 당시 PX 풍경에 대한 묘사는 이런 식이다.

“그 일대에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꼬여들어 사고팔고 속고 속이고 훔치고 구걸하느라 마음껏 흥청대고 있었다.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국적 활기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천박의 근원지가 바로 PX였다.”

훗날 신세계백화점으로 변신했던 그곳은 이웃 남대문시장과 함께 대한민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자궁이 아니던가? 전쟁 때 인공(人共, 인민공화국) 치하 서울에 대한 묘사도 생생하다. 피난을 못 갔던 그녀는 수령 교시 따위를 읽는 민청학습 등에 시달리면서 ‘황폐의 극치’를 체험했다. 어느 정도였을까? “나는 전쟁 중 생리가 멎었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는…. 반세기 전 서울을 무대로 만들어졌던 북한식 사회주의 지옥, 전체주의 지옥에 대한 증언으로 이만한 게 없다.
[Book & Movie] 싱아와 은방울꽃이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우리가 부수고 나와야 할 '옛 질서'로 그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싱아》, 《그 산》은 “우리 소설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년의 공간”(평론가 이남호)을 담고 있어 더욱 각별한데, 그 아름다움은 개성 옆의 촌동네 박적골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어릴 적 이곳을 떠났던 그는 여고시절에 잠시 내려와 고향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데, 그게 이 책의 백미 중의 하나다.

[Book & Movie] 싱아와 은방울꽃이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우리가 부수고 나와야 할 '옛 질서'로 그려
“박적골의 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은 처음 알았다. 한창 감수성이 피어날 열다섯 소녀였다. 동무 없이 몽유병자처럼 산과 들을 누볐다. 박적골 여자들처럼 종다래끼를 옆에 차고 다니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산길을 헤매다가 음습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됐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 싶게 비현실적 향기에 끌려서였다. 그늘진 골짜기에 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렸다.”

더 길게 인용하지 못해 유감이다. 그만큼 아름답다. 박적골은 ‘그 많던 싱아’와 ‘은방울꽃’으로 상징되는 전 시대 낙원이 아닐까? 하지만 한국인들은 그곳을 빠져 나와야 했다. 더 머물 수 없었던 봉건적 구질서였다. 이후 만난 새로운 낙원이 산업화·근대화의 오늘이다. 이 대목에서 고백한다. 《싱아》와 《그 산》을 추천한 이유는 이 대목 때문이다. 요즘 우리 현대사를 두고 제멋대로의 해석이 난무하는데, 감히 밝히지만 두 소설에 드러난 한국인의 삶이야말로 가장 왜곡되지 않은 날 것의 것이다. 10대들의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그 진실을 살펴 읽길 재삼 권유한다.

■ "박완서 문학의 백미이자, 최고의 성장소설"
[Book & Movie] 싱아와 은방울꽃이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우리가 부수고 나와야 할 '옛 질서'로 그려

평소 두 소설을 내 마음의 성장소설로 찍어놓고 있던 차에 얼마 전 EBS-TV의 다큐멘터리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 프로에서는 경기 용인의 성서초등학교 5학년생 모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들은 국어 시간 한 학기 동안 문학작품 한 권을 읽어내는 대장정에 나섰다. 놀랍게도 코흘리개들이 손에 쥐고 읽어내는 작품이 《싱아》였다. 요즘 말로 언빌리버블이었는데, 《싱아》는 그냥저냥 괜찮은 작품인이 아니라 박완서 문학의 백미에 속한다. 데뷔작 《나목(裸木)》을 포함한 박완서 문학의 원형이 모두 녹아있는 문제작이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문학에서 뺄 수 없는 그 작품을 10대 초반의 꼬마들이 척척 읽어내고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실로 즐거운 충격을 받았다. 큰 것은 작은 것도 겸한다고 하더니 《싱아》와 《그 산》이 그 경우일까? 어쨌거나 10대 후반의 고교생들이 이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미 그 책을 읽었다고? 상관없다. 그 책을 다시 읽기를 당부하며, 훗날 대학생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되읽기를 함께 권유한다.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 읽을 때 더 즐거운데, 두 책이 그러하다.

참고로 EBS-TV에 나오는 꼬마들도 이 책을 슬로 리딩(slow reading)했다. 그냥 천천히 읽는 것은 물론 그걸로 연극놀이를 하는 등 다양한 체험학습을 병행하면서 책에 몰입하는 방식이다. 그 프로그램이 지금도 충격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싱아》와 《그 산》을 읽고 말하는 학생들의 표정이었다. 실로 인상적이었다. 고백컨대 저토록 의젓하고, 저토록 생동감 넘치는 10대들의 모습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조우석 <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