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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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세계인을 매혹시키다.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단순히 ‘점심에 뭘 먹을 것인가’에서부터 ‘신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어마어마한 명제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상관없지만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라면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내가 없다고 확신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안이 있다는 게 인생의 난제다. 나의 확신으로 완결되는 것과 확신으로 완결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립한 뒤 《그리스인 조르바》를 대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그리스 작가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치 종교 서적처럼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 명사들도 가장 감명받은 책으로 스스럼없이 꼽는 소설이다. 매혹적인 질문과 답변, 함께하고 싶은 공간과 음미하고 싶은 말들이 책 갈피갈피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무방비로 끌려가기보다 나만의 답변을 생각하며 책을 대하면 좋을 듯하다.이 책의 화자는 35세 남자로 방안에서 원고를 쓰고 책 읽는 데 빠져 산다. 방안에서 자판만 두드리거나 모바일로 천하를 주유하지만 제대로 된 경험이 없는 요즘 사람을 닮았다. 책벌레라는 놀림을 받던 나는 크레타 해안의 갈탄 광산을 개척하러 떠나기로 결정한다. 우연히 만난 65세의 알렉시스 조르바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세 살 난 아들을 잃은 뒤 방랑자로 살아가는 조르바가 툭툭 내뱉는 말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여행과 경험, 만남과 부딪침에서 비롯된 생생함에 책만 읽던 나는 곧바로 매혹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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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김유정 '동백꽃'
1930년대 17세 처녀의 사랑그 시대 풍경을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감동까지 받을 수 있는 장르로는 소설이 가장 적합하다. 2017년 대한민국 17세는 대학입시 준비로 많은 것을 절제하며 지낸다. 1930년대 17세는 어떤 압박을 받았을까.<동백꽃>의 17세 점순이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너 얼른 시집 가야지?”라는 얘기를 듣는다. 남자는 스무 살만 넘어도 노총각이라고 불렸으니 1930년대 17세의 관심은 온통 결혼이었을 듯하다.일제가 조선을 일본화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던 때, 학교에서 우리말도 배울 수 없고, 우리말로 문화 활동도 하기가 쉽지 않을 때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동백꽃>을 읽기 바란다. <동백꽃>을 실은 <조광>이라는 잡지는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어로 글을 싣다가 끝내 종간되었다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서울로 이주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고 선언한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야학과 간이학교를 운영하다가 방랑생활을 하거나 금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2년 남짓만에 쓴 단편들그러다 소설가 안회남의 권유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1935년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2년 동안 3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과 10여 편의 에세이를 남겼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김유정이 쓴 소설에는 작가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l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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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녹십자 허영섭
한국은 백신의 강국이다. 2010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한국의 제약사가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백신 납품 자격을 인정받았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였다. 제약 기업인 녹십자 이야기다.세계 6번째로 신종플루 백신 납품전자산업이나 자동차산업에 비한다면 한국의 제약산업은 많이 뒤떨어졌다. 화이자(독일), 노바티스(스위스), 로쉬(스위스) 등 세계적 제약사들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혈액제제인 백신만은 녹십자의 한국산 백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녹십자의 뿌리는 1967년에 세워진 ‘수도미생물약품’이다. 동물용백신 제조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1969년 극동제약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1년에는 (주)녹십자로 상호를 바꿨다.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성공시킨 사람은 허영섭이다. 1941년생으로 원래 교수가 되고자 독일에 유학 중이던 공학도였다. 그가 제약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70년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허영섭은 독일 유학 중 귀국해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입사했다.필수의약품 국산화이 회사의 대주주 허채경은 허영섭의 부친이었다. 개성 상인으로 한일시멘트를 세워 성공한 기업가였다. 군의감(군의관 중 최고직) 출신 국립보건원장이던 김수명 씨의 청을 받아 혈액제제 사업에 투자하게 됐다. 혈액 관리는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 시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허영섭에게 녹십자는 의무복무 기간만을 채우려고 들어간 곳인데 평생을 함께한 기업이 됐다. 처음에는 공무부장으로 시작했지만 곧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면서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사명인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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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 '종신형'
덴마크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라고 하면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로도 만들어진 《정복자 펠레》의 작가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넥쇠는 덴마크가 자랑하는 최고의 소설가다. 1869년에 코펜하겐 빈민가에서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고향인 본홀름섬에서 목동, 양화점 직공 등으로 일하면서 여름과 겨울 일이 없을 때 국민고등학교에 다니며 꿈을 키웠다.<종신형>의 주인공 마티스 로우는 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불만이었다. 어머니는 사십대였고 아버지는 그보다도 열 살이나 위였다. 마티스가 장난치고 노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무엇이든 하지 못하게 했다. 어려서부터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했던 마티스는 아버지나 어머니 곁에 있으면 그저 짜증이 났다.작가 넥쇠와 <종신형>의 마티스, 그리고 우리들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작가 넥쇠는 가난한 데다 11남매가 북적이는 집에서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11남매 가운데 넷째여서 일찌감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에 투입되었다. 힘든 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쉬지 않아 청년 시절 교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고 29세 때 단편집 《그림자》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발표한 《정복자 펠레》가 성공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85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일평생 글쓰기를 계속하여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넥쇠는 다양한 직업을 거치는 가운데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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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LG 구자경과 구본무의 인화와 혁신
■ 기억해 주세요LG는 인화를 중시한다. 가족은 물론 임직원 사이가 좋아야 기업이 잘 된다는 경영철학이 깔려 있다. 대기업 경영권 승계도 이런 분위기 탓에 잡음 없이 이뤄져 왔다. LG의 제품 역사에는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라디오, TV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도 LG다.해외출장을 다니다 보면 LG 로고가 찍힌 TV를 자주 보게 된다. 호텔 방에 갖춰 놓은 TV가 LG 제품인 경우가 많아서다. LG는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LG의 출발은 진주의 포목점이었다. 창업자는 구인회이고 포목점의 이름은 구인회상점이었다.창업자 구인회 ‘최고 기업 만들자’해방 후 부산에서 화장품, 플라스틱 제품 사업으로 성공을 거뒀고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해서 대기업이 됐다. 구인회가 창업해 국내의 최고 기업을 만들었다면 그의 장남인 구자경과 또 다시 그의 장남인 구본무는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웠다.구자경은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학교 선생님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 구인회의 엄명으로 락희화학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공장 직공들과 같이 기름밥을 먹고 뒹굴며 기업 생활을 익혔다. 1969년 창업자 구인회가 6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장남인 구자경이 럭키금성그룹(LG그룹의 옛이름) 회장직을 승계했다. 구자경의 나이 45세였다.럭키금성이 국내에서는 1~2위를 다퉜지만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음 단계의 도약을 위해서는 좁은 국내를 벗어나야 했다. 구자경은 수출을 늘리는 동시에 생산기지 자체를 해외에 만들기 시작했다. 1982년 미국의 헌츠빌에 TV공장을 세웠고 1987년 독일, 1988년에는 영국과 멕시코, 태국, 필리핀 현지에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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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23) 정몽구와 품질 기적
■기억해 주세요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품질이 나쁜 차로 알려져 있었다. 미국의 까다로운 소비자를 만족시키려면 품질을 끌어 올려야 했다. 정몽구 회장은 품질 혁신에 사활을 걸었고 그 결과 세계 5위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1998년 현대자동차는 현대그룹에서 분리됐다. 정몽구가 새로운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이 됐지만 기쁨에 취할 수만은 없었다. 현대자동차의 품질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신차 품질조사를 하면 현대자동차가 단골 꼴찌였다. 코미디의 소재가 될 정도로 품질이 형편없었다.‘현대차가 80마일 이상 달릴 수 있나’미국의 인기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맨 쇼의 진행자 데이비드 레터맨은 다음과 같은 말로 현대차를 조롱했다. “현대자동차를 80마일(128㎞) 이상 달리게 하는 방법은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것뿐이다.”이러다가는 미국 시장을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회장이 되자마자 전 직원에게 품질 경영을 선언했다. 품질을 경영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불량이 발견되면 생산라인 전체를 멈추게 하는 제도였다. ‘오피러스’의 소음을 잡기 위해 수출품 선적을 40일간 미루기까지 했다.정몽구는 자동차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맡은 첫 일이 전국을 돌며 고장 난 현대차를 고쳐주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장직을 맡았던 것도 현대자동차서비스였다. 자동차가 왜 고장이 나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현장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 경험을 가지고 그는 생산현장을 누볐다. 사장과 고위 임원들에게도 현장으로 내려가서 노동자들과 호흡을 같이하게 했다.그러면서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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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제임스 조이스 '애러비'
옆집 누나를 사랑하는 소년열에 들떠서 ‘옆집 누나, 교회 오빠’를 사랑하지 않고 10대를 지나버리면 그만큼 심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순수했던 시절 그 누나와 오빠를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 창고를 꼭 간직하길 바란다.「애러비」의 주인공 ‘나’는 어느 순간 친구 맹간의 누나를 좋아하게 된다. 맹간이 누나를 괴롭힐 때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나풀거렸고, 부드럽게 땋아 내린 머리채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아침마다 맹간의 집을 훔쳐보다가 그녀가 현관 앞으로 나오면 바로 책가방을 쥐고 달려 나가 그녀의 뒤를 쫓는다. 갈림길 지점에 오면 ‘나’는 일부러 걸음을 빨리하여 그녀를 앞지른다.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괜히 그 앞에서 서성이는 일, 소년의 마음이 「애러비」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SNS가 발달되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확인하고 바로 만남을 갖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나’가 답답할지 모르지만 사랑 앞에서 가슴이 뛰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듯하다.‘20세기 문학에 변혁을 일으킨 모더니즘의 선구적 작가’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니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무조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T S 엘리엇은 조이스의 소설이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라. 그것이 이 위대한 작가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더블린 사람들』을 읽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를 보면 좋을 것이다.『더블린 사람들』은 15편의 단편소설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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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건희와 초일류 삼성
삼성전자는 세계적 초일류 기업이 됐다. 인터브랜드 발표에 따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459억달러로 세계 7위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보다는 낮지만 GE와 BMW, 아마존보다 높다. 한국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탄생한것이다.‘위기’ 속 찾아온 ‘기회’삼성을 이렇게 만든 주역은 이건희 회장이다. 이병철은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이건희는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것은 1987년. 당시 회사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문제는 반도체였다. 1983년 이후 막대한 투자가 계속됐다. 그 덕분에 기술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선발 주자들을 상당히 따라잡았지만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적자의 연속이었다. 반도체 부문에서의 적자 때문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는 상태였다.그러던 중 뜻밖에 행운이 찾아왔다. 1988년 반도체 대박이 터진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 붐 덕분이었다. 컴퓨터는 원래 집채만큼 큰 물건이었는데 스티브 잡스 같은 미국의 천재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을 정도로 크기를 줄이는데 성공했다. 컴퓨터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반도체 역시 날게 돋친 듯 매출이 늘었다.한 해 동안 반도체로 벌어들인 이익이 그동안의 적자를 다 메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삼성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올라섰다.과감한 사업 구조조정그다음 사업은 자동차였다, 아버지 때부터 시도했지만 정부가 허가를 안 내줘서 숙원사업이 됐다. 김영삼 정부 때 어렵사리 허가를 받아 자동차사업에 착수했다. 닛산과 합작으로 출시한 SM5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외환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