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홀아비에 팔려가는 복녀복녀는 15세에 20년 연상의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서 시집을 간다. 남편은 지독히 게으르고 무능하였으며 결국 그들은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 주민이 된다. 복녀는 거지 행각을 하며 간신히 연명한다. 인근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들끓자 복녀를 비롯한 빈민굴 주민들이 송충이잡이 인부로 고용된다. 일종의 빈민구제사업이다. 처음에 열심히 송충이를 잡던 복녀는 젊은 여인 몇몇이 놀면서도 더 많은 품삯을 받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그들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감독에게 일종의 매음을 하게 된 것. 그 후 복녀는 본격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남편은 복녀가 벌어온 돈을 보고 벌씬벌씬 웃는다. 가을이 되자 복녀는 빈민굴 여느 여인들처럼 칠성문 밖 중국인 채마밭에 감자 도둑질을 하러 간다. 어느 날 밤 복녀는 밭 주인 왕서방에게 들키고 그 일을 계기로 아예 왕서방의 정부로 전락하게 된다. 왕서방에게 받은 돈 덕택에 이들 부부는 빈민굴에서는 부자로 통하게 된다. 이듬해 봄 왕서방은 젊은 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된다. 질투심에 눈이 먼 복녀는 낫을 들고 신방에 뛰어들지만 낫을 뺏아 든 왕서방에게 살해된다. 이후 왕서방, 남편, 한의사는 모종의 거래를 하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진단을 받고 공동 묘지에 실려간다. 1920년 사회상이 그대로···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다. 입학에 즈음하여 아버지가 한국문학전집을 사 주셨다. 그 전집 제일 앞 권에 김동인의 「감자」가 실려 있었다. 여름방학 과제로 독후감상문을 쓰기도 했다. 어떤 내용을 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줄거리를 요약한 후 작품 해설을 뒤적여서 몇 줄의 감상을 곁들였을 것이다. 그때 쓴 독후감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작품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의 감상을 중1의 진솔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너.무.놀.랐.다 정도가 아니었을까? 놀람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우선 결혼한 여자가 매춘을 하는 것, 다음으로 그것이 남편의 묵인을 넘어 적극적 협조로 이루어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살인이 몇 푼의 돈으로 무마된다는 것, 그것도 배우자와 정부와 의사에 의해.
성인이 된 지금에도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그때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복녀가 처한 상황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생겼을 뿐. 복녀는 원래 가난하지만 엄한 가율이 있는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다. 1920년대 식민지 사회가 빚어낸 빈궁이 아니었으면 평범한 아낙으로 지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환경이 인간을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냉혹한 세상에 내동댕이쳐져 비참하게 스러져간 인간을 목도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독자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작가가 서사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결과일 것이다. 서사의 참혹함을 배가하는 것은 역시 냉정한 작가의 문체이다. 인물의 내면에는 일별도 않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인 날렵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냉혹한 서사를 더없이 효과적으로 실어 나른다. 특히 마지막 장면.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겼다. /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 왕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 묘지로 가져갔다.>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한 장면 같다.
마음을 아프게 한 소설
때로 문학 작품은 상처를 준다. 중1이 읽은 「감자」가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처를 입은 것은 비참한 삶 자체가 아니라 비참한 삶에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패배하는 인물을 난생 처음 아무런 준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명작동화를 읽던, 그야말로 어린이아니었던가. 좀 더 나이를 먹고 읽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들으시면 섭섭하시겠다.
그러나 소설 한 편이 아팠다고 웅크릴 필요는 없다. 문학의 바다는 넓고 깊어서 비참을 그리는 태도 역시 다양하다. 다음 회에는 중1이 읽었더라도 ‘안전했을’ 것 같은 빈민문학 한 편을 함께 읽어 보려 한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