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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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조제 마우로 데 바스콘셀로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세계를 감동시킨 제제『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언제 읽어도 깊은 감동과 깨끗한 마음을 안겨주는 성장소설의 고전이다. 성장소설은 어린 주인공이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자아에 눈뜨고,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린 화자의 영악하지만 순수한 행동을 통해 독자들도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질감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여섯 살이 채 안 된 제제, 우리나라 셈으로 따지면 일곱 살쯤 된 아이일 것이다. 1968년에 브라질 작가가 발표한 작품 속의 제제와 50년이 지난 지금의 어린이는 얼마나 다를까. 환경은 차이가 나지만 어른들이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발표 당시 브라질에서 유례없는 판매기록을 세웠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19개국 32개 언어로 번역돼 미국을 비롯, 유럽과 공산권에까지 소개됐으며 파리 소르본대에서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1978년에 소개돼 지금까지 300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바스콘셀로스는 제제처럼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이 너무 가난해 어린 시절을 친척집에서 보내야 했다. 작가의 유년시절 체험을 눈에 보일 듯 재미있고 진솔하게 그린 것이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도를 넘은 악동 기질로 주변 사람을 종종 위험에 빠뜨리는 제제는 반대로 너무도 순수한 마음을 가졌다. 동생 루이스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단단한 제제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구두닦이로 나설 정도로 철이 바짝 든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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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미래에셋 박현주… 금융의 새 시대 열다
‘백할머니’를 만나다미래에셋을 세운 사람은 박현주다. 그는 1984년 내외증권연구소라는 초보적 형태의 투자자문사를 여는 것으로 금융업에 첫발을 디뎠다. 당시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다. 수업시간에 배운 주식투자를 직접해보기 위해 집에서 목돈으로 보내준 학비와 하숙비로 벌인 일이다. 이때 박현주의 멘토가 된 사람은 명동의 큰손 ‘백할머니’였다고 한다. 당시 대다수 주식투자자는 감이나 루머에 의존해 주식을 사고팔았는데 특이하게도 백할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유망한 회사의 주식을 사서 2년이고 3년이고 묵혀 뒀다가 주가가 오르면 팔아서 큰돈을 벌곤 했다. 요즈음 말하는 ‘가치투자’를 그 당시부터 하고 있었던 셈이다. 박현주는 백할머니에게서 가치투자를 배웠다.1986년에는 내외증권연구소의 문을 닫고 동양증권에 입사했다. 1988년엔 동원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독특한 영업전략으로 약정실적 전국 1위를 달성했다. 그의 주변에는 많은 직원이 모였고 ‘박현주 사단’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하게 됐다.증권사 거쳐 창업투자사 설립1997년에는 동원증권을 나와서 투자자문사인 미래에셋창업투자를 설립했다. 박현주 사단의 멤버 상당수가 창업에 동참했다. 창업 직후 외환위기가 닥쳤지만 미래에셋에는 오히려 기회였다. 채권에 200억원을 투자해 50억원을 남겼고 벤처기업 ‘다음’에 24억원을 투자한 것이 1000억원으로 커져서 돌아왔다. 가치투자가 빛을 발한 것이다.1998년 법이 개정돼 간접투자가 허용됐다. 즉 남의 돈을 맡아서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박현주는 ‘박현주 1호’라는 한국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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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개츠비와 톰과 데이지의 무모한 선택《위대한 개츠비》는 대단한 타이틀을 많이 갖고 있다. 미국 뉴욕 랜덤하우스 출판사에서 ‘20세기 영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을 선정했을 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가 두 번째로 꼽혔다. ‘옵저버’ 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 ‘타임’ 선정 현대 100대 영문소설 등 명작을 선정할 때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먼저 거론되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F 스콧 피츠제럴드는 포크너, 헤밍웨이와 함께 20세기 미국소설의 삼총사로, 세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위치를 굳혔다.《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 일명 ‘재즈시대’로 불리던 시절이다. 당시 미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전쟁의 승리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다. 상류계층은 재산을 늘릴 최적의 기회를 맞아 도덕적 타락과 부패를 일삼으며 개인의 욕망을 채웠고, 비정상적인 팽창으로 1929년에 증권시장이 몰락하면서 미국 사회는 대공황을 맞게 된다.1920년대에 미국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전쟁의 참화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청년들 가운데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로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위대한 개츠비》는 ‘잃어버린 세대’로 지칭하는 젊은이들과 당시 사회상을 실감 나게 묘사하면서 최고의 작품으로 떠올랐다. 1896년에 태어난 피츠제럴드가 자신이 온몸으로 겪은 시대를 작품에 반영해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소설을 읽으면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어리석은 개츠비’로 바꿔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역시 개츠비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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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CJ그룹 이재현과 한국영화산업
한국 영화가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국내 영화시장에서의 점유율만 봐도 알 수 있다. 1995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관객수 기준의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 수준이었다. 국내 영화 관객의 80%는 한국 영화가 아니라 외국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스티븐 스필버그와의 만남그러던 것이 지금은 한국 영화가 50% 이상을 차지한다. 2016년을 예로 들면 한국 영화 점유율은 54%로 외국 영화 관객 비율 46%를 8%포인트나 앞섰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한국 영화를 인정하기 시작해서 액수가 많진 않지만 제법 수출도 이뤄진다.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CJ가 큰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와의 합작을 통해 그들의 앞선 노하우를 들여왔고 영화 제작에 안정적인 자금을 댔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세웠다. 극장은 어둠침침하고 냄새 나는 곳이었는데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관객도 늘었다. 이런 바탕이 마련되자 한국 영화인의 실력이 늘어갔고, 좋은 영화가 만들어졌다.CJ의 뿌리는 이병철 회장이 1953년 설립한 제일제당이다. 1993년부터 삼성그룹에서 분리 작업을 시작해 1996년 CJ그룹으로 출범했다. CJ가 영화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5년부터다. 당시 미국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드림웍스라는 영화사를 세우느라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CJ가 3억달러를 투자해 드림웍스의 대주주로 등장했다.‘본업’ 밖으로 눈을 돌리다3억달러면 당시 환율로 2300억원, 그룹 총자산 1조원의 23%에 해당했다. 그렇게 큰 금액을 설탕과 조미료 등 식품만 만들던 기업이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영화에 투자한 것이다. 사운을 건 결단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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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톨스토이가 네 번이나 읽었다안톤 체호프는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한국 유명 작가 가운데 “체호프는 단편의 재능이 없어 오래 고심해온 내게 중요한 스승이 돼준 작가”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이들이 있다. 체호프가 ‘귀여운 여인’을 발표했을 때 톨스토이는 네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잡지 편집자와 평론가를 눈물을 흘리게 한 ‘골짜기’에 대해 러시아 대문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갈채를 받는 체호프는 의대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유머 단편을 쓰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860년 러시아 남부 아조프해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난 체호프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 파산하자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886년에 처음으로 ‘추도회’라는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했으며 2년 뒤 단편집 황혼으로 푸시킨상을 수상하면서 눈에 띄었다.인간의 속물성과 허위를 배격하고 진실한 인간성을 반추하는 단편소설을 여러 편 남긴 체호프는 희곡에도 관심을 기울여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같은 세계 희곡사의 걸작들을 써냈다.현대 단편소설의 길을 가르치다체호프의 여러 작품 가운데 ‘귀여운 여인’ ‘약혼자’ ‘골짜기’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보자. 왜 톨스토이가 네 번이나 읽었을까? 네 번의 사랑을 각각 음미하느라 그랬을까? ‘귀여운 여인’을 읽으면 대문호 톨스토이의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자기주장이 강한 시대인 만큼 자기 색깔이 없는 올렌카의 삶에 고개를 갸웃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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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혁신적 음악기업가 이수만
케이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 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 와 모습에 열광한다.SM의 힙합 프로젝트K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와 모습에 열광한다.K팝의 뿌리에는 이수만이라는 기업가가 있다. 그는 주먹구구식 대중가요 산업에 체계적 예측과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재능이 보이는 아이들을 뽑아서 매력적인 스타로 키워냈고 해외로도 진출시켰다. 외국 작곡가, 안무가들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적 감각의 음악을 생산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주식시장에 상장해 투자자들과 ‘윈윈’ 하는 채널도 만들어냈다.이수만은 원래 가수이자 방송진행자였다. 연예기획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은 1980년 미국 유학 중 음악 전문 케이블채널인 MTV를 보면서였다. 그전까지의 음악은 ‘듣는 것’이었는데 MTV는 그 음악들에 색채와 패션을 혼합해서 ‘보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수만도 한국에서 ‘보는 음악’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었다. 귀국해서 돈을 모은 후 1989년 연예기획사인 SM기획의 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첫 기획은 힙합 프로젝트였다. 이태원의 어린 춤꾼들이던 현진영, 강원래, 구준엽을 발탁해 ‘현진영과 와와’를 구성했다. 미국에서 인기 절정이던 바비브라운을 모델로 훈련을 시켜나갔다. 성공의 조짐이 보이던 차에 마약사건이 터져 물거품이 된다. 모든 투자금을 날리고 거의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한다. SM기획 소속 가수와 작곡가들도 모두 곁을 떠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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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정유정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세 친구으르렁대기 일쑤인 같은 학교 동급생 두 소년과 한 명의 소녀, 안 그래도 반항으로 터질 것 같은 열다섯 살인데 어른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이들 셋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 덩치 크고 사나운 개 한 마리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섯 조합이 운명공동체가 되어 남도를 향한다면? 개성적인 인물들이 끊임없이 티격대면서 목적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함께 떠난 길에서 불꽃 튀는 충돌이 일어나지만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이해가 싹트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떠나 숱한 일을 겪으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써먹은 형식이다.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왜 그들이 함께 떠나는지가 중요하다. 성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은 대개 ‘고향’을 찾아가지만 청소년소설은 대개 ‘집’을 떠난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세 친구도 호기롭게 집을 나가지만 숱한 모험 끝에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행방불명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준호에게 엄마는 연하의 사진작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막걸리 공장 사장 아들인 승주는 일부러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엄마의 이상한 법칙 때문에 절에서 스님과 함께 지내며 자유를 속박당하고 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정아는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면서도 폐인이 되다시피 한 불쌍한 엄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예측불허의 사건이 벌어지고엄마가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 준호는 절친한 친구 규환으로부터 자신의 형에게 여권과 돈을 전달해 달라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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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6>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한국 화장품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에 와서 사가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도 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다. 국산 화장품은 랑콤이나 시셰이도 같은 외제 화장품보다 급이 한참 낮은 것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창업자는 서성환··· ‘아모레’ 탄생이렇게 된 데에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회장의 역할이 컸다. 연구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서 국산화장품의 품질을 높였다. 또 일찍부터 한국 화장품의 해외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물론 K팝과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한국 화장품에 대한 인기로 이어진 측면이 있지만 그 전에 품질과 판로 개척을 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아모레퍼시픽의 뿌리는 개성의 창성상점이다. 1932년 개성에 살던 윤독정 여사가 머릿기름, 세안수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다. 아들인 서성환도 거들기 시작했고 모자(母子)가 같이하는 사업이 됐다. 가게 이름은 창성상점이었다. 해방 후 서성환은 서울로 옮겨와서 태평양화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화장품 제조판매를 시작했다. 6·25전쟁으로 내려간 부산 피난지에서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가 큰 히트를 친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서도 화장품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1961년에는 <아모레>를 화장품의 이름으로 정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라는 가사에서 따온 단어인데 당시 누구나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유행하던 노래의 가사였다.태평양화학을 바꾸다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태평양화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해갔다. 서성환의 차남인 서경배가 태평양화학에 들어간 것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