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최초의 근대소설비중에 경중은 있지만 음식과 요리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이 꽤 많다.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인 이광수의 《무정(1917)》에도 인상적인 음식이 둘 등장한다.
동경 유학에서 돌아와 경성학교 영어강사로 재직 중인 이형식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김 장로의 딸 김선형에게 연정을 품는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 박 진사의 딸 박영채는 형식을 사모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경성학교 교주의 아들 김현수에게 겁탈당한다. 영채는 죽음을 결심하고 평양행 기차를 타지만 동경 유학생인 신여성 김병욱을 만나 봉건적 관습을 벗어버리고 자신도 당당한 신여성이 되기로 결심한다. 일본 유학을 떠나는 영채와 병욱, 미국 유학길에 오른 형식과 선형이 우연히 같은 기차에서 만나게 되고, 이들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하는 역군이 될 것을 다짐한다.
이것은 대강의 줄거리다. 영채는 자살을 결심하고 탔던 평양행 기차 안에서 병욱을 만나게 된다. 병욱은 슬픔에 잠긴 영채에게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를 낀 것’을 권한다. 영채는 처음 보는 음식을 어떻게 먹을지 몰라서 병욱이 먹는 모양으로 따라 먹는다. 이후 영채는 병욱의 가르침을 받으며 ‘구도덕과 낡은 사상의 종’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서 자기 뜻대로 다시 살기로 한다. 이 먹거리는 영채에게 일종의 부활의 음식인 것이다. 이후 친해진 병욱은 영채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고 너 그때에 먹은 것이 그게 무엇인지 아니?”
“나 몰라, 어떻게 먹는 겐지 몰라서 언니 잡수시는 것을 가만히 봤지요.”
“내 아예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은 서양 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어……. 꽤 맛나지?”
“응.” 하고 고개를 까딱하며 ‘샌드위치’ 하고 발음이 분명하게 외운다. 공격당하는 된장찌개
한편 주인공 형식의 하숙집 주인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했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지만 노파의 정성을 깨뜨리기가 미안하여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격이 활달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형식의 벗 신우선은 ‘그 험구로 노파의 된장찌개가 극히 좋지 못함을 비웃’는다. 노파의 자랑하는 된장찌개에서 구더기를 발견하자 ‘형식이가 황망하게 우선의 입을 막았으나 우선은 일부러 빙긋빙긋 웃어 가며 소리를 높여 노파의 된장찌개 만드는 솜씨의 졸렬함을 공격’한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형식을 방문할 때 “요새는 된장찌개에 구더기나 없소?” 하고 노파를 놀리기까지 한다. 그 후 노파는 우선을 쾌활한 남자라고 칭찬하는 일이 없어진다.
노파의 자랑이던 된장찌개가 우선에게 무참히 공격당하고 있다. 이것이 작가 이광수가 된장을 딱히 의도적으로 폄훼하려고 쓴 장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외려 어디에나 있던 된장, 어디에나 구더기가 끓었던 당시의 위생 수준이, 그리고 젊은 시절 화려한 순간을 살았던 어느 여인의 퇴락과 노쇠가 자연스럽고도 사실적으로 반영된 장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더기 꾀는 된장(이 작품에서 된장은 시종 구더기를 동반한다)과는 다른, 당시 아무나 먹을 수 없던, 웬만한 사람은 구경도 하기 힘들었을 ‘양음식’ 샌드위치를 당대의 이광수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던 그 음식은 춘원이 지향했던 민족의 나아갈 길, 근대화의 방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음식이 또 다른 주인공
음식은 글에 풍미를 더하며 독자의 미각을 예민하게 하여 감성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할 음식을 선별하는 기준에는, 또 음식에 이미지와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에는 분명 작가의 세계관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사소한 소품일지라도 음식은 문학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일 수 있다. 우리가 그간 읽은 작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던 음식에는 어떤 것이 있던가 생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