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두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 소설은 아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스무 살 두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는 꽤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주인공은 못생긴 외모로 놀림 받고 상처 받으며 나이를 먹었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는 그녀는 남자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멈칫거리는데, 외모만 수려하고 불성실하기 짝이 없어 어머니를 불행하게 했던 아버지를 가진 남주인공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손을 내민다. 어렵게 여자가 마음을 열고 둘은 서로를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자는 마음속의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난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 헤매고 둘은 간신히 재회한다. 남자가 여자의 오랜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둘 사이에는 드디어 애틋한 시공이 열린다. 그러나 그 만남을 끝으로 둘의 사랑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내용이 궁금하면 일독을 권한다.
사진은 이 소설책의 표지로 쓰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는 마르가리타 왕녀. 왕녀 양쪽에서 시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고 큰 캔버스 앞에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궁정화가의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애견 오른쪽에는 왕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동원된 두 명의 광대가 있고 그림 뒤편 작은 거울에는 왕녀의 부모인 펠리페 4세 부부가 비친다. 이 그림은 해석이 분분하다. 벨라스케스가 마르가리타 왕녀를 그리는 중에 국왕 부부가 방문한 상황이라고도 하고 「시녀들」 자체를 제작하는 상황이라고도 하고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대상이 국왕 부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표지로
벨라스케스는 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박민규 작가가 이 책의 표지로 이 그림을 택한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아마도 작가가 주목한 사람은 왕녀 오른쪽, 애견 뒤에 서 있는 푸른 옷을 입은 광대가 아닐까 싶다. 저 광대 마리아 바르볼라는 왜소증을 앓고 있던 성인 여자라고 한다. 어리고 화사한 용모의 마르가리타 왕녀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여성이 이 상황에서 떠맡은 역할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녀의 얼굴에서 억눌린 분노가 읽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부와 미모를 지닌 극소수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에게 군림해 온 시스템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문제는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그것을 욕망하고 부러워한 절대 다수였다는 것이다. 그 부러움의 시선이 그 소수에게 빛을 몰아주어 그들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열쇠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자 주인공이 주춤 뒤따랐던 것처럼.
모리스 라벨의 춤곡
원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매료됐던 단신의 작곡가(키가 150㎝ 정도였다고 한다) 모리스 라벨의 무곡(舞曲) 제목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주 좋아해 남주인공에게 선물한 음반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내내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외모마저 ‘스펙’이 된 괴상한 시대를 살며 외모 관리에 열심인 우리 학생들도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비추는 빛나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
이 소설은 아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스무 살 두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이 이야기는 꽤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주인공은 못생긴 외모로 놀림 받고 상처 받으며 나이를 먹었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는 그녀는 남자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멈칫거리는데, 외모만 수려하고 불성실하기 짝이 없어 어머니를 불행하게 했던 아버지를 가진 남주인공은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손을 내민다. 어렵게 여자가 마음을 열고 둘은 서로를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자는 마음속의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난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 헤매고 둘은 간신히 재회한다. 남자가 여자의 오랜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둘 사이에는 드디어 애틋한 시공이 열린다. 그러나 그 만남을 끝으로 둘의 사랑은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내용이 궁금하면 일독을 권한다.
사진은 이 소설책의 표지로 쓰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는 마르가리타 왕녀. 왕녀 양쪽에서 시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고 큰 캔버스 앞에는 벨라스케스 자신이 궁정화가의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애견 오른쪽에는 왕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동원된 두 명의 광대가 있고 그림 뒤편 작은 거울에는 왕녀의 부모인 펠리페 4세 부부가 비친다. 이 그림은 해석이 분분하다. 벨라스케스가 마르가리타 왕녀를 그리는 중에 국왕 부부가 방문한 상황이라고도 하고 「시녀들」 자체를 제작하는 상황이라고도 하고 벨라스케스가 그리는 대상이 국왕 부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볼수록 묘한 그림이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표지로
벨라스케스는 왜 저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박민규 작가가 이 책의 표지로 이 그림을 택한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아마도 작가가 주목한 사람은 왕녀 오른쪽, 애견 뒤에 서 있는 푸른 옷을 입은 광대가 아닐까 싶다. 저 광대 마리아 바르볼라는 왜소증을 앓고 있던 성인 여자라고 한다. 어리고 화사한 용모의 마르가리타 왕녀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여성이 이 상황에서 떠맡은 역할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녀의 얼굴에서 억눌린 분노가 읽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부와 미모를 지닌 극소수의 인간이 그렇지 못한 절대 다수에게 군림해 온 시스템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문제는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그것을 욕망하고 부러워한 절대 다수였다는 것이다. 그 부러움의 시선이 그 소수에게 빛을 몰아주어 그들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열쇠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자는 것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자 주인공이 주춤 뒤따랐던 것처럼.
모리스 라벨의 춤곡
원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매료됐던 단신의 작곡가(키가 150㎝ 정도였다고 한다) 모리스 라벨의 무곡(舞曲) 제목이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주 좋아해 남주인공에게 선물한 음반이기도 하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날 내내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외모마저 ‘스펙’이 된 괴상한 시대를 살며 외모 관리에 열심인 우리 학생들도 언젠가는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비추는 빛나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