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주 선생님과 함께하는 한국문학 산책
동동은 작은북 소리?
12연이나 되는 시가는 어딘가 부담스럽지만 그게 월령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일 년은 열두 달이니 매달 대응하는 시가가 하나씩. 낱개 포장된 12개의 과일이 한 박스에 포장된 느낌이라고 할까. 독립성이 있으면서 전체로는 하나다. 읽다 보면 연과 연 사이에서도 리듬감이 느껴진다. 색다른 맛이 나는 매력적인 형식이다.고려가요 ‘동동’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월령체 노래다. 서사까지 합치면 총 13연. 동동은 북소리로 추정된다. 둥둥이 큰 북소리라면 동동은 작은 북소리다. 작은 북소리지만 그 울림은 작지 않다. 작품 속 목소리는 아무래도 여인의 것이지 싶다. 사랑을 잃은 여인. 씩씩하게 실연의 아픔을 걷어내지 못하고 연중 사랑을 앓는 여인이다.
<정월 냇물은 얼었다 녹았다 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시작인 정월령부터 고독하기 짝이 없다. 매섭고 찬 기운이 옷자락을 파고들어 그 고독감을 배가한다. 봄이 오면 좀 나아질까? 3월령은 노래한다. <3월 지나며 핀 아아 늦봄의 진달래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태어나셨구나.> 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찬양은 원래 반한 사람의 몫. 연정이 봄 아지랑이 같이 일렁인다.
여인의 비애는 12월령···
그러나 그뿐 작품 어디에도 임과 함께하는 순간은 찾을 수 없다. 5월 5일 수릿날에는 임의 만수무강을 비는 약을 바치고 7월 보름 백중날에는 제물을 벌여 놓고 함께 살고자 소원을 빈다. 8월 보름에는 임을 모시고 지내야만 뜻있는 한가위가 될 거라고 노래하고 9월 9일 중양절에는 노란 국화꽃이 핀 집 안에서 적막감을 견딘다. 여인을 이다지도 외롭게 한 임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4월령에 단서가 살짝 보인다. <사월을 잊지 않고 아아, 오는구나 꾀꼬리여 무엇 때문에 녹사님은 옛날을 잊고 계신지요.> 녹사는 고려시대 중앙의 여러 관서에 설치된 하위 관직이다. 녹사님과 여인은 사랑하는 사이였겠지만 꾀꼬리가 기억하는 이곳의 봄을 녹사님은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의 마음의 크기와 녹사님의 마음의 크기는 같지 않아 보인다. 대칭이 깨어진 마음은 보기 안타깝다. 녹사님이 녹사님이라면 여인은 누구일까? 여인은 스스로를 유월 보름에 벼랑에 버린 빗 같다고 한다. 시월에 잘게 썬 보리수나무 같은 자신을 지니실 한 분이 없다며 회한에 젖는다. 여인은 여염집 아낙은 아니었을 것 같다. 단단하게 묶여 오래 함께할 임을 가질 수 없었던 여인의 비애는 12월령에서 극에 달한다. <12월 분디나무로 깎은 아아, (임께 드릴) 소반 위의 젓가락 같구나. 임의 앞에 들어 가지런히 놓으니 손님이 가져다가 뭅니다.>
서사가 첨가되다
이 작품은 구전되다 후대에 궁중 속악의 가사로 수용되었다. 의식 절차를 갖추기 위해 서사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서사의 기능은 송도(頌禱), 즉 덕과 복을 비는 것이다. 실연의 아픔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적층문학이니만큼 여인도 한 명이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시상이 일관되어 있지 않다. 2월령의 임은 높이 켜 놓은 등불다워서 만인을 비추실 모습을 지녔으니 녹사님이라기보다는 임금일 것이다. 3월령, 5월령의 임 역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애초에 지녔던 연가의 성격을 잃지 않고 여인들과 떠나버린 녹사님들과 서글픈 인연들을 품고 있다. 임금을 송축하든 녹사님을 원망하든 이 노래의 주인은 역시 여인들이리라. “11월 봉당 자리에 아아, 홑적삼을 덮고 누워 슬픈 일이구나. 사랑하는 임과 갈라져 각기 살아가는구나.” 라며 옛것이 되어 버린 사랑으로 현재를 사는 여인들. 피었다 시들어 버린 사랑, 그 가엾은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손은주 < 서울사대부고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