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균의 '연금술'
2030년, 감기에 걸려 약국에서 해열진통제를 샀다. 그런데 약사가 건네준 이 해열진통제의 원료는 작년에 내가 마시고 버린 음료수병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곧 현실이 될지 모른다. 최근 과학자들이 플라스틱 폐기물로 해열진통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대장균을 이용해서 말이다.
과학자들이 버려진 음료수 병을 재료 삼아 해열진통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픽사베이 제공
과학자들이 버려진 음료수 병을 재료 삼아 해열진통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픽사베이 제공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연구팀은 유전자 변형 대장균을 이용해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라이트(PET)를 파라세타몰(아세트아미노펜)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자주 먹는 타이레놀에 들어 있는 성분이 바로 이 파라세타몰이다. 연금술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연구팀은 ‘로센 재배열’이라는 유기화학 반응에 주목했다. 이 반응은 1872년 독일의 화학자 빌헬름 로센이 발견한 것으로, 하이드록삼산(hydroxamic acid)의 원자 배열이 바뀌어 이소시아네이트라는 물질로 변환되는 반응이다. 이소시아네이트가 물과 만나면 최종적으로 ‘아민’이 만들어진다. 150년 가까이 된 이 반응은 유기화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아민은 의약품, 플라스틱, 염료 등 다양한 물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화합물인데, 로센 재배열 반응은 특정 구조의 아민을 합성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하지만 이 반응은 고온과 강한 염기가 있는 혹독한 조건에서 독성이 있는 시약을 사용해야 일어난다. 그래서 특수 장비와 안전시설을 갖춘 실험실에서만 가능했다. 그런데 연구팀은 이 반응을 살아 있는 대장균 내에서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대장균을 작은 화학 공장처럼 개조했다. 로센 재배열 반응과 파라세타몰을 합성할 수 있는 대사 경로를 가진 새로운 대장균을 만든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버섯과 토양 세균에서 유래한 유전자를 각각 하나씩 삽입했다.

그리고 대장균이 실제로 파라세타몰을 생산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먼저 폐페트병을 분해해 테레프탈산이라는 물질을 얻고, 이를 대장균 배양 배지에 넣었다. 대장균 내부에서 여러 효소 반응을 통해 테레프탈산은 하이드록삼산 유도체로 변하고, 로센 재배열 반응을 통해 파라아미노벤조산(PABA)이라는 물질이 된다. 이 PABA는 다시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파라세타몰이 된다. 연구팀은 24시간 동안 최대 92%의 높은 수율로 파라세타몰이 생산됐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은 상온에서 진행됐으며, 탄소 배출도 거의 없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선 로센 재배열 반응처럼, 대부분의 화학반응은 특수 장비와 가혹한 반응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번 연구를 통해 살아 있는 생명체 안에서도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는 화학과 생물학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합성생물학 분야에도 큰 진전이다. 합성생물학은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생명체의 구성 요소를 조합해 새로운 기능을 만드는 연구 분야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기존의 생명체를 원하는 기능에 맞게 재설계한다. 이번 연구는 후자에 해당하며, 대장균의 유전자를 조작해 복잡한 유기화학 반응을 수행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환경적·경제적으로 의미가 크다. 음료수병이나 식품 포장재에 사용하는 PET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3억 5000만 톤 이상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발생시키며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PET는 자연적으로 분해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므로, 분해되지 않은 상태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 해양 생태계를 위협하거나 땅에 쌓여 동식물에 해를 끼친다.

의약품 역시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파라세타몰을 비롯한 많은 의약품은 화석연료에서 유래한 원료로 만들어지며, 제조 과정에서도 막대한 양의 탄소가 배출된다. 2022년 기준 제약 산업의 탄소 배출량은 약 1억 9300만 톤에 달하며, 수익 대비 탄소 배출량은 자동차 산업보다 55%나 많을 정도로 탄소 집약적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은 이러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PET 폐기물을 친환경적으로 재활용하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유용한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이 기술의 확장 가능성이 크다고 밝히며, 다른 종류의 플라스틱과 의약품 생산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물론 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규모를 키우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플라스틱 폐기물이 항생제나 비타민으로 변신하는 날이 그리 멀진 않은 것 같다. 과학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해답을 찾아나가고 있다.√ 기억해주세요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
오혜진 과학칼럼니스트·前 동아사이언스 기자
이번 연구는 환경적·경제적으로 의미가 크다. 음료수병이나 식품 포장재에 사용하는 PET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3억 5000만 톤 이상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발생시키며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파라세타몰을 비롯한 많은 의약품은 화석연료에서 유래한 원료로 만들어지며, 제조 과정에서도 막대한 양의 탄소가 배출된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은 이러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PET 폐기물을 친환경적으로 재활용하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유용한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