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례는 우리말에서 ‘-자’와 ‘-인’에 대한 언어적 차별 인식이 사회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바뀌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 언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말이라도 ‘-자’보다 ‘-인’을 좀 더 품위 있는 말로 여기게 된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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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대통령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써주기를 바랍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언론사에 다소 이례적인 주문을 했다. ‘대통령직인수에관한법률’ ‘국회법’ 등에서 ‘당선인’이란 말을 쓴다는 점이 명분으로 제시됐다. 항간에선 그동안 별문제 없이 써오던 말을 바꿔달라는 인수위 요청에 다양한 해석과 함께 열띤 논란이 이어졌다. 그중에 ‘놈 자(者)’보다는 ‘사람 인(人)’을 쓰는 게 격이 좀 높아 보인다는 해석도 꽤 그럴듯하게 제시됐다. ‘-자’와 ‘-인’의 구별은 사회적 규정논란이 커지자 헌법재판소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헌재 결정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당선인’보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대로 ‘대통령 당선자’라는 표현을 써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다. 당시 ‘이명박 특검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입장을 덧붙인 것이다. 어찌 됐건 인수위의 요청에 언론사들은 대부분 ‘당선인’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당선자 대신 당선인을 쓰는 게 관행으로 굳어졌다.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인권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그전에는 ‘장애자’로 불렸다. 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공식 표기가 ‘장애자올림픽’이었다. 장애자란 말 자체에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말을 낮춰 부르는 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새로 제시된 말은 ‘장애인’이었다. 이후 1989년 장애자복지법을 개정한 장애인복지법이 나오면서 ‘장애인’이 우리 사회에 공식 용어로 등장했다. 나중에 ‘노숙자’가 ‘노숙인’으로 바뀌게 된 배경도 비슷하다.

이런 사례는 우리말에서 ‘-자’와 ‘-인’에 대한 언어적 차별 인식이 사회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바뀌어왔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 언어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같은 말이라도 ‘-자’보다 ‘-인’을 좀 더 품위 있는 말로 여기게 된 것이다. 속담은 써도 되나? 난제 부닥쳐하지만 본래 우리말에서 ‘-자’와 ‘-인’에 그런 구별이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자, 지도자, 선구자 등에서 보듯이 존대 의미는 ‘-인’보다 ‘-자’가 더 강하고, 쓰임새도 폭넓다는 게 국어학계의 연구 결과다. 우리 사회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자’와 ‘-인’을 구별해 쓰게 됐고, 그런 관행이 자리 잡은 것은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였다. 즉 애초 일반적인 의미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니고, 구체적 말들에 대한 의미 용법을 통해 구별해 보니 공통적 흐름이 있었다는 뜻이다. 요즘 ‘-자’보다 ‘-인’을 더 대접해 부르는 말로 여기는 데는 인위적·사회적 의미 규정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적으로 낮춤말이 아니었던 장님과 벙어리, 귀머거리 등이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청각장애인으로 바뀐 데도 그런 과정과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특히 이들 말에선 두 가지 문제 제기로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 원래 평어인데, 즉 낮춰 부르는 말이 아닌데 하향식으로 대체어가 제시됐다는 점에서 오는 저항감이다. 대표적인 게 ‘장님’이다. 1990년대 초까진 장님이 오히려 소경의 높임말이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에도 낮잡는다는 뜻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어느 순간 이들을 낮잡는 말로 처리했고 국어사전도 이를 반영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쓰지 말아야 할 말로 평가된 셈이다.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이에 따라 수많은 속담에 쓰인 말을 어찌 풀어야 할 것인지 난감해졌다. 우리말에서 ‘장님’으로 시작하는 속담만도 30개가 넘는다. ‘앉은뱅이책상’ 등 파생어와 수사적 표현들은 또 어찌해야 할까?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점에서 우리말 어휘를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또 하나는 비록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한자어는 대접해 부르는 말, 고상한 말이고 고유어는 낮춰 부르는 말이 돼 순우리말을 격하시켰다는 비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역시 우리말 진흥과 육성에 역행하는 일이다. 이제 차별어에 대한 논의를 한 단계 고도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