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샛 경제학
(152) 유동성 함정
동맥 안쪽에 지방 등이 쌓여 혈관이 좁아지면 혈액이 원활히 돌지 못해 생명에 치명적일 수 있지요. 경제에도 이 같은 상황이 존재합니다. 돈은 경제활동에서 혈액과 같은 역할을 하죠. 돈이 돌지 않는 경제는 상상하기 힘든데요, 그래서 이런 상황을 ‘돈맥경화’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돈이 시중에 돌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돈을 움켜쥔 경제주체
[테샛 공부합시다] 불황기 돈만 푼다고 경제 살아날까?
가계나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하지 않고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경제가 침체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경제주체는 왜 돈을 가지고만 있으려 할까요? 1930년대 미국에서 대공황이 발생하자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고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았지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이러한 상황을 ‘유동성 함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경제주체는 현금을 움켜쥐고 있으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리를 낮춰도 돈이 돌지 않고, 경기가 침체에 빠지는 것이지요.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우선 현금통화 비율이 상승해 중앙은행이 본원통화 1단위를 공급했을 때, 이의 몇 배에 달하는 통화량이 창출되었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승수’가 낮아집니다. 신용 창출이 둔화한다는 의미로, 돈이 돌지 않는다는 것이죠. 일정 기간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에 사용되는 횟수를 나타내는 지표인 ‘화폐유통속도’도 하락하지요. 한국도 여러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통화승수(그래프)가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힘 빠진 통화정책유동성 함정의 다른 사례로는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 2008년 미국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있습니다. 모두 경제가 극심한 침체에 빠진 순간이지요. 특히 일본은 당시 기준금리를 0%대까지 낮췄지만, 오히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물가도 하락(디플레이션)하는 경기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 사례를 잘 살펴보면, 경기가 침체한 상태에서 앞으로도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없고, 비관론이 더 확산될 때 유동성 함정이 발생합니다. 기준금리를 최대한 낮춰도 경제 활력이 살아나지 않으니 통화정책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낮아진 금리에 따라 경제 구조조정이 늦어지는 등의 부작용도 발생하지요.

그렇다면 유동성 함정에 대응할 방법은 없을까요? 재정지출을 늘려 총수요를 늘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기적 효과는 보겠지만, 장기적으로 국가부채가 늘어나 국가 신용등급과 경제 전반의 펀더멘털에 부정적입니다. 다른 주장으로는 중앙은행이 돈을 무제한 찍어 경제주체들의 디플레(물가하락) 심리를 깨는 것입니다. 경제주체에게 앞으로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를 심어주면, 화폐가치 하락으로 돈을 보유하기보다 사용할 것이란 거죠.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부터 코로나19 팬데믹까지 풀린 막대한 통화량이 결국 높은 물가 상승으로 돌아오는 부작용이 발생한 바 있지요. 그래서 단순히 돈을 풀어 경기를 인위적으로 자극하기보다 한계기업 구조조정, 각종 규제 혁파를 통한 산업 진흥 등 근본적인 성장 대책으로 경제주체에게 경제가 잘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영동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