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리디노미네이션
요즘 식당에 가면 8000원이 아니라 ‘8.0’식으로 가격을 표시해두는 곳이 많죠. 원화의 단위가 크다 보니 이를 간략히 표기하는 건데요, 화폐단위를 정부 차원에서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고 합니다. 화폐와 관련, 비문학 지문에 충분히 나올 만한 소재랍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결과미국 1달러는 한화로 약 1300원 정도지요. 단위로 보자면 무려 1300배나 차이가 나는 겁니다. 베트남의 화폐인 ‘동’은 10만 동이 한화로 5500원가량이니 또 차이가 엄청나지요. 이렇게 나라별로 화폐의 단위는 천차만별입니다. 이는 화폐의 가치 변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한 나라의 화폐가치는 그 나라의 경제 상황에 따라 변해요. 예를 들어 고성장하는 국가는 그만큼 돈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만큼 화폐가치는 떨어지겠죠. 성장 속도가 인플레이션 속도보다 빠르다면 화폐가치를 유지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반대일 때예요. 성장은 둔화하는데 인플레이션은 계속 빨라질 때죠. 당연히 화폐가치는 떨어지죠.
이달 초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1만 페소 지폐를 유통한다고 발표했어요. 딱 1년 전 2000페소 고액권을 내놓고 5배짜리 고액권을 또 내놓은 거죠. 연간 인플레이션이 300%에 가까워지면서 지난 5년간 화폐가치가 무려 95%나 급락한 탓이에요. 계속 이렇게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어떻게 할까요. 어느 순간 화폐단위를 깎을 수밖에 없죠.
200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는 1000억 짐바브웨 달러를 갖고 달걀 3개도 못 샀다고 해요. 돈으로 휴지를 살 바에야 차라리 돈을 휴지로 쓰는 게 낫다고 할 정도였죠. 짐바브웨는 화폐단위에서 무려 ‘0’ 10개를 한 번에 지웠어요. 1000억 달러가 10달러가 된 거죠. 1960년대 프랑스는 자국 화폐인 프랑의 단위를 100분의 1로 줄여 미국 달러와의 비율을 맞췄고, 그 덕분에 화폐가치가 높아졌어요. 브라질은 총 6번이나 자국 화폐단위를 줄였죠. 이렇게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은행권 및 주화의 액면을 가치의 변동 없이 동일한 비율로 낮춰 표시하거나, 화폐 호칭을 새롭게 바꾸는 걸 리디노미네이션이라고 해요. 한국의 리디노미네이션 사례한국도 리디노미네이션을 한 적이 있어요. 한국전쟁 이후 생산 활동이 줄어든 상황에서 거액의 군사비 지출이 문제가 됐어요. 인플레이션 압력은 높아지고 당시 원화 가치는 폭락했죠. 1953년 2월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화폐 액면금액을 100대 1로 절하하고, 화폐단위를 圓(원)에서 (환)으로 변경했어요. 1962년 6월에는 화폐 액면을 10분의 1로 조정하면서 다시 ‘원’으로 표기를 바꿨어요. 지금의 원이 이때부터 시작된 거죠.
북한도 2009년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줄였어요. 물가가 급등한 데 따른 대응책이었지만 오히려 기존 화폐의 신뢰를 떨어뜨리면서 주민들은 미국 달러와 중국 위안을 사들였죠. 북한의 박남기 계획재정부장은 이 문제로 총살까지 당했어요.
리디노미네이션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려는 목적만 있는 건 아닙니다. 돈의 가치가 달라지면 은행에서는 특정 기간 동안 기존 화폐를 새 화폐로 바꿔줘요. 그렇게 되면 숨겨둔 현금자산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겠죠. 장롱 속 돈을 끄집어내 화폐 유통을 활성화하고, 정치적으로는 비자금 등을 끌어내는 의도도 있습니다.
한국도 현행 화폐단위가 높고 체감 물가 상승에 기여하는 만큼 리디노미네이션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한국은행도 리디노미네이션이 내수경기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평가했어요. 장부상 단위가 높아 회계 처리가 어렵다는 점도 이유로 꼽히죠. 하지만 단위를 바꾸는 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합니다. 비용 대비 이익이 있는지 따져봐야 하는 문제죠. 새 화폐 발행 등에 필요한 직접 비용만 3조 원 이상으로 추산됩니다. 요즘처럼 한국 물가가 계속 오른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건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윤상 기자 NIE 포인트1.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는 이유를 모두 알아보자.
2.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어떤 문제점이 생길까.
3. 세계 각국의 리디노미네이션 사례를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