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개화기 때인 1894년 11월, 개혁의 일환으로 내려진 고종칙령 1호에서 한글은 우리나라 공문서의 공식문자로 등장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약 450년 만이었다.
2019년 3월 ‘금명간’이 갑자기 인터넷 실시간검색(실검)에 떴다. “경찰에서 한 연예인의 구속 영장을 금명간 신청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온 뒤였다. ‘금명간’이 뭐지? 누리꾼에게 이 말이 생소했던 모양이다. ‘금일’을 금요일로 오해하고, 순우리말 ‘고지식’을 한자어 고지식(高知識, 물론 이런 말은 없다)인 줄 아는 것도 다 오십보백보의 오류다. 개화기 때 한글을 국문(國文)으로 지정금명간(今明間) 대신 차라리 ‘곧’이나 ‘오늘내일’, ‘이른 시일 안에’ 같은 일상의 말을 썼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굳이 ‘금일(今日)’이란 한자어를 쓰지 말고 쉽게 ‘오늘’이라고 했으면 누구나 알아봤을 텐데…. ‘고지식하다’는 성질이 외곬이라 융통성이 없을 때 쓰는 순우리말이다. 이를 엉뚱한 의미인 ‘높은(高) 지식(知識)’으로 해석하는 데선 무지 속에 스며든 창의력(?)도 엿보여 ‘웃픈’ 느낌이다.글쓰기의 ‘읽기 쉽고, 알기 쉽게’란 명제 앞에 ‘한자어와 쉬운 우리말’의 관계는 종종 곤혹스러운 화두를 던진다. 제576돌 한글날(10월 9일)을 앞두고 우리말이 처한 현실이다. 단순히 말장난 같은 해프닝이라 하기엔 우리말 실태가 구조적으로 복잡하다. 비슷한 어휘력 논란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과 한자, 고유어와 한자어, 거기에 영어와 일본어 등 외래어가 뒤섞이면서 치열한 ‘언어적 세력다툼’을 벌여온 게 지난 100여 년의 우리말 역사다. 특히 한글 전용 대(對) 한자 혼용 논란은 광복 이후 때론 격렬하게, 때론 느슨하게, 그러면서도 줄기차게 부딪쳐온 갈등의 반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필귀정: 네 필의 말을 타고 돌아옴, 즉 성공해 오다’ ‘여인숙: 여인이 머물러 있는 곳’ ‘古稀紀念(고희기념): 고대 희랍 축제일’ ‘新株(신주): 새로운 전봇대’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가 이끌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1973년 4월 ‘대학생들의 국어실력’이란 조사자료를 발표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전국 12개 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우리말 이해도를 조사한 결과였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반세기 전의 실태지만 답변 양상이 근래 불거진 ‘심심한 사과’나 ‘무운을 빌다’류와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당시 충격은 지금보다 더해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신문마다 ‘한심한 대학생 국어실력’ ‘한자 까막눈’ 등 강렬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한글 우수성, 컴퓨터 보급 늘면서 입증한글파와 한자파 간 갈등의 뿌리는 고종칙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복 후 우리말 되살리기(이는 한자와 일본어 잔재의 추방으로 이어진다) 작업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시기에 따라 한글과 한자 간 세력 판도가 요동쳤다. 그것이 역사의 큰 줄기다.
갑오개혁. 개화기 때인 1894년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이다. 그해 11월, 개혁의 일환으로 내려진 고종칙령 1호에서 한글은 우리나라 공문서의 공식문자로 등장했다.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용한다.’ 그동안 언문으로 불리며 천시되던 한글이 비로소 ‘국문(國文)’이란 위상을 갖게 된 순간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지 약 450년 만이었다. 하지만 지배층의 주요 표기 수단은 여전히 한자였다. 당시 이 칙령이 한자로 공포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광복 이후엔 최현배 선생 주도의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글 되살리기 정책이 펼쳐졌다. 특히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는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한글전용 정책에 힘입어 한글파 목소리가 우세했다. 한자파의 ‘대학생 국어실력’ 조사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불거진 위기감의 발로였다.
지금 같은 한글 위주 글쓰기는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궤를 같이한다. 1990년대 컴퓨터 업무가 대중화하자 신문에서도 일제히 가로쓰기, 한글 중심 표기가 자리잡았다. 자연스럽게 무거운 한자는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는 기술 발전과 함께 한글의 우수성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고종칙령으로 한글이 공식문자로 등장한 지 100여 년이 지난 뒤 실현된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