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통치다'는 크게 꾸짖는다는 뜻이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잘못을 엄하게 나무랄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의 막말을 전하면서 '호통쳤다'고 하면 곤란한 이유다. 그저 '큰소리쳤다' 정도로 하면 무난하다.
‘단어의 선택’은 글쓰기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살펴본 사례들도 바로 이 단어 용법에 관한 것이었다. 글 쓰는 이가 구사하는 단어의 폭에 따라, 여기에 최적의 단어를 골라낼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따라 글의 품질이 결정된다. 그중에서도 글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문장론적 방법은 무엇일까? ‘호통치다’는 ‘꾸짖다’는 뜻…北막말엔 옳지 않아글쓰기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나 표현을 쓰는 능력은 중요하다. 글에 신뢰감을 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각종 논문류를 비롯해 보고서, 설명서 등 실용문을 작성할 때 더 그렇다. 하지만 ‘객관성’은 상대적 개념이라 이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럴 때 비교적 검증된 방식이 공인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가령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봉기’ 등 비슷비슷한 용어 앞에서 무엇을 쓸지 고민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동학농민운동’을 선택하면 된다. 예전에는 ‘제주도 4·3폭동’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정부에서는 이를 버리고 ‘제주도 4ㆍ3사건’으로 정리했다. ‘폭동’이란 표현이 자칫 지역주민 전체를 폭도로 몰아 사건 자체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5·16혁명’이라 쓸지‘5·16쿠데타’로 쓸지 망설인다면 불법적 찬탈의 의미를 배제한 ‘5·16 군사정변’을 쓰는 게 좋다. 모두 교육부에서 채택한 교과서 편수용어라 공공성을 확보한 말이다.
‘천황’은 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이다. 이를 우리 언론에서 또는 국민이 천황이라 할지, 일왕이라 표기할지에 관한 논쟁은 아주 오래된 담론이다. 확실한 것은 ‘천황’은 일본어 ‘덴노(天皇·てんのう)’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굳이 말하자면 ‘덴노’가 있을 뿐, ‘천황’은 일본에도 없고 오로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비정상적인 말이다. 이를 ‘일왕’이라 칭하는 것은 용어를 주체적 관점에서, 남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로 쓴 결과다. ‘일왕’이란 표현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인다는 것은 이 말이 공공성을 확보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누구의 ‘관점’에서 말을 사용하는지 살펴야말에 관한 ‘주체적 용법’은 용어뿐만이 아니라 일반적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다음 문구를 살펴보자. “중국과 주변국들 간의 도서 분쟁, 일본과 주변국들 간의 역사 분쟁.” 여기서 ‘주변국’이란 표현은 어떨까? ‘주변’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의 둘레, 즉 중심에 대응하는 말이다. 더구나 ‘주변국’이나 ‘주변부’는 지난날의 낡은 종속이론에서 쓰던 용어로, 좋은 표현이 아니다. 한국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주변국’이라 칭해서 시쳇말로 ‘셀프디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중국과 이웃 나라들 간의 도서 분쟁, 일본과 이웃나라들 간의 역사 분쟁” 정도로 쓰는 게 좋다.
이해관계가 얽힐 때 서술어를 결정하는 것도 ‘관점’이다. 다음 문장에서는 어디가 적절치 않을까? <북한의 외무성 국장은 “비핵화라는 ×소리 집어치워야… 우리는 계속 무섭게 변할 것”이라며 호통쳤다.> 지난해 이즈음은 북한이 대북전단을 핑계로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남북 관계가 극도로 긴장돼 있던 때였다. 당시 북한 고위층에서 나온 발언을 소개한 대목이다. 여기서 ‘호통치다’가 마뜩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어야 한다. ‘호통치다’는 크게 꾸짖는다는 뜻이다.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잘못을 엄하게 나무랄 때 쓰는 말이다. 북한의 막말을 전하면서 ‘호통쳤다’고 하면 곤란한 이유다. 그저 ‘큰소리쳤다’ 정도로 하면 무난하다. 핵심은 ‘나의 관점’에서 단어를 선택해 써야 한다는 것이다.